평생 잊지 못할 생일을 보내고

예상하지 못했던 프로포즈의 추억

by Nara Days

결혼 준비를 시작했단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프로포즈 받았어?" "프로포즈 해달라고 해!" "프로포즈는 어떻게 받고 싶어?"


나의 답은 늘 글쎄였다.


앞글에서도 다룬 것처럼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한지는 한 달도 안되었지만, 결혼까지 흘러온 과정은 상당히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둘 다 상대방과 결혼을 원한다는 것이 깔려있었고, 프로포즈는 내가 '요청'해서 받는게 아니라고 생각을 해왔다.


하물며 연애를 하면서도 난 한번도 무언가를 사달라라고 한 적이 없다. 손편지를 제외하고는 '뭐 해줘' '뭐 사줘'라는 말을 하기엔 실제 무언가를 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없었고, 이미 많은 부분을 애인이 충족을 해주고 있었기에... 물론 어릴 때 보고 자란 섹스앤더시티의 한 장면처럼 익숙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다가 반지를 건네는 프로포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었지만, 우리 관계에 있어 무언가 내가 우선순위로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나의 애인은 그런 곳에 눈과 귀가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애인의 주변에는 대부분 미혼의 남성이었고, 그는 2주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도 결국 매일 출근하고 야근까지 해야하는 불쌍한 영혼에 출근하지 않을 때는 거의 나와 함께 있기에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그가 프로포즈를 준비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엔 어려웠다.


11월 19일 금요일, 그 날은 나의 서른 네 번째 생일이었고 그 날 역시 그는 휴가를 냈지만 출근을 했어야 했다. 4시 쯤 일이 끝나니 퇴근하고 바다에 가자는 그의 말과는 달리 그 날 역시 그는 야근을 했고, 나는 이미 그의 일이 범람하는 스케줄에 익숙해진터라 집에서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 온 그와 나는 그가 급히 예약을 해둔 스페인 식당에서 뽈뽀와 빠예야를 시켜먹었고, 둘이 사귀기 시작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밥을 먹는 내내 나는 원래 바다를 가기로한 스케줄이 어그러져서인지, 일이 너무 바빠서인지 편두통이 와서 타이레놀을 찾는 그를 보고 무언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그 날은 유독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는데, 평소 사람이 엄청 많은 공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한산했던 광교호수공원을 둘이 걸었다. 조금 걷다가 그는 오리를 보라며 잠시 멈춰세웠고,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를 만나 어쩌고 저쩌고 내가 어쩌고 저쩌고.. 나는 그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 아무말 대잔치를 했고 (오빠가 늦었는데 늦짱 부리는 것까지 다 이해하는 사람이 될거야~ 같은) 갑자기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 여자들의 로망이라는 (난 이게 여자들의 로망인지도 이번에 알았다) 민트색 박스가 나왔다.


어안이 벙벙하여 보고 있는데, 그가 반지를 껴주려 뚜껑을 여는데 아뿔싸, 너무 긴장한 그가 박스를 뒤집어서 들었고 반지는 반지 케이스 천장에 달려있었다. "아, 열심히 연습했는데 왜 이러지" 라며 멋쩍게 웃는 그는 나의 왼쪽 네번 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나라야 나와 결혼해줄래?" 라는 말에... 정말 모든게 완벽했던 그 순간에... 내가 망쳐버렸다.


나는 기질적으로 오글거림을 못 참는 성격인데 (그래서 티비를 보면서도 조금이라도 불편한 장면이나 어색하거나 오글거리면 눈을 가리거나 넷플릭스도 다 스킵한다), 그 순간 나는 "오빠 우리 지금 결혼 취소하면 식장 위약금 물어야해..." 라는 산통을 깨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 로맨스를 지키지 못하는 자여..... 그 순간 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 까지도 목격을 해버렸다.


여튼 다시 수습을 하고, 조금 넋을 찾고 뒤늦게 밀려오는 감동에 엉엉 울며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스트릿우먼파이터의 문명특급에서 가비가 이야기한 "YES, YES and YES!"를 인용해 "난 예스 예스 앤 예스야!!" 라고 답했다. 눈물을 훔치고 콧물을 훌쩍이며 반지를 받았는데, 문득 그를 보니 그 역시도 눈물을 닦고 있어 왜 우냐고 물어보니 "내가 너무 기특해서"라고 하는 그는 진정한 ESTP였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일지언정 식당에서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던 이유는 너무 긴장해서 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어쩜 그의 눈물은 단순 자기애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큰 반지를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그의 말이 무색하게 내 손에는 너무나도 예쁘고, 멋지고, 고마운 반지가 껴져있었다. 그제서야 왜 웨딩밴드를 맞추러 갔을 때 그가 우리 사이즈를 기재 해 놓은 차트를 따로 찍었는지, 호수공원 주차장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하니 춥다고 뛰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화장이 지워지도록 웃고 울다를 반복하며 서로를 오래 안고 있었고 "우리 진짜 행복하게 잘 살자!"를 다짐하고 차로 돌아왔다.


차에 앉아 조금 마음을 추스리고 반지를 낀 내 손을 바라보고 있던 중 그는 트렁크에서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가지고 왔다. 실물로는 처음 영접하는 하얀 꽃이 달려있는 샤넬 쇼핑백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전혀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고 "뭐야?"라고 했더니 열어보라는 그의 말에 "나?" "내가?"라는 말만 반복했던 것 같다. 조심스레 박스를 열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샤넬 백이 있었고, 알고보니 나에게는 출근을 했다고 하고 아침 6시 전부터 오픈런을 해 총 네군데를 통해 12시간만에 수령한 가방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이 오픈런을 위해 여러 정보를 섭렵하고, 쿠팡에서 낚시용 간이의자까지 구하고, 추운 새벽녘부터 줄을 서서 샀다고 하는데 오픈런의 자세한 메커니즘도 몰랐던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 가방의 가치보다도 정말 이 사람의 노력이 격하게 감동스러웠다. 또한 샤넬 매장에 가서까지 대학을 같이 나온 여자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페이스타임으로 어떤 스타일을 사면 여자친구가 좋아할까라는 질문에 그 여자후배의 회사 동료들도 다 페이스타임에 참여해 조언을 줬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몇 주 전부터 애인은 나에게 "샤넬 가방 사줄까?" "샤넬 어때?" "우리 샤넬 쓱 보고 갈까?"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샤넬은 커녕 그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브랜드 가방들도 잘 들지 않는 나는 당연히 그 말을 넘겼다. 결혼 준비 전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종종 쇼핑몰에 가면 가방을 사주겠다고 내게 여기저기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나는 "오빠 그렇게 입고 슬리퍼 신어서 안돼~" 라는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하기 일쑤였다. 실제 몇백만원을 주고 가방을 사는 것은 나와 잘 맞지 않았고, 함께 있던 애인의 복장은 너무 편안했으며 (ㅋㅋ), 무언가 큰 물건을 아무 이유 없이 받는 것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다. 백화점에 갈 때마다 "샤넬을 쓱 보자는" 그의 제안에 "오빠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 샤넬은 쓱 보고 갈 수 있는데가 아닐거야.." 라고 무마를 했었는데, 이런 깜찍한 생일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나는 분위기상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오글거리는 것을 싫어해 브라이덜 샤워도 원치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건만, 그런 나의 심리를 간파한 것인지 무엇인지 애인은 정말 모든게 나에게 딱 맞춤형으로 프로포즈를 해주었다. 만남을 시작한 공원에서의 산책을 하다 준 반지, 반지를 하면서 건넨 말들, 그리고 그 속의 정성들까지 모든게 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이 넘쳐 불안감까지 들기 시작했던 지난 며칠의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이 글을 쓰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여전히 상대방이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나, 화려한 프로포즈가 행복한 결혼생활의 징표나 축약본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왜 많은 사람들이 프로포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싼 물건을 내게 사주는 재미가 들려 매 해 샤넬백을 사주겠다며, 갖고 싶은 것 다 갖게 해주고 "싸모님"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그의 요즘 다짐들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도 부유하고 행복하며 다 가진 마음이다. 평생 이렇게만 서로 아껴주고 위해준다면, 나는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나 역시도 그에게 오랜동안 그런 마음을 들게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날짜를 잡은 후엔 무엇을 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