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에 대한 사소하지만 다소 중요한 이야기들
나는 프로계획러다.
늘 신년을 맞으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해의 계획을 적을 플래너 구매하기였다. 새로 산 플래너가 얼마나 나의 신년 계획을 잘 풀어내고, 지켜주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플래너를 샀었다. 내가 십수년간 쓴 몰스킨은 그런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고의 플래너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구매력과 계획 능력을 지닌 동시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 것은 바로 용두사미의 기질이었다. 계획을 할 때의 설레임과 결의와는 달리, 몇 달이 지나면 참 머쓱해질 정도로 많은 것이 제자리 혹은 도돌이표였다. 살면서 (돈주고) 내가 배운 운동만 해도 (반 이상은 엄마의 의지였지만) 피겨스케이트, 수영, 스쿼시, 농구, 배드민턴, 단전호흡 (이건 대체 왜) 탁구, 발레, 여러 요가, 필라테스 1:1, 다수의 PT 등이 있으니까.. 한동안은 달리기에 빠져 10k등을 뛰며 메달 받는 재미도 들렸었다. 나의 오른쪽 발목 인대가 완전 고장나기 까지는.
여하튼 나의 이런 기질과는 달리 애인은 계획을 하지 않는다. 몇 년뒤에는 얼마의 돈을 벌고 등의 굵직하고 거시적인 무엇이 아니면 나처럼 한 해 계획을 자잘자잘하게 세우며 투두리스트 따위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 매일매일을 들여다보면 "왜 저렇게 삘가는대로 하지" 싶고 가끔은 의아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나보다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그리는 큰 무엇에 도달하기 위한 액션 포인트들을 쪼개고 쓰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인데, 그는 굵직하게 그린 그림은 대체적으로 다 이루어낸다.
위에 서술한 나의 성격 때문인지 나는 결혼을 앞두고도 여러 계획을 세우기 바빴다.
우리의 재정적인 계획, 5-6년 뒤 우리 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계획, 가구 구매 계획, 집안일 나누기 계획, 청소 루틴짜기 계획 등등.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많고 혼자 하고 싶은 것도 많은지라, 이러한 계획들도 우리의 결혼생활 속에 우겨넣으며 애인의 컨펌을 받기 바빴다. 이러한 계획들을 세울 때면 다른 것보다 특히 청소의 루틴 부분에 있어 애인은 다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의 어렸을 때 기억 속 일요일은 항상 '온 가족이 함께 청소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걸레질. 아빠는 청소기를 돌리고 내가 모든 방에서 취합한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 내다 버리는 일을 하셨다. 그 것은 매주 일요일 아침 동물농장이 끝나면 당연히 모든 가족이 지켜야 하는 의무적인 루틴이었고, 나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기에 청소의 루틴과 주기를 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애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틀리단 것은 아니다. 다만지금 보면 어쩌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계획하며 결혼생활을 단순히 다른 두 개체의 '동거'의 개념으로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어느 정도 우리가 하는 일은 나누어져 있는데 (음식물 쓰레기를 비롯 모든 쓰레기는 애인이 버리며, 청소기는 로봇청소기가 한 후 애인이 필터를 비우고, 설거지나 가구 위 먼지 청소는 내가 많이 하며 화장실, 베란다 및 창문 청소는 숨고 고수님을 부른다) 나는 실질적인 결혼생활이 시작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청소와 위생에 대한 개념이 달라 서로 충돌할 것이 지레 걱정이 되어 노파심에 열심히 규칙을 세운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상반되는 우리 둘 사이에서 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들을 먼저, 그리고 자주 꺼내는 사람은 내가 아닌 애인이다.
애인이 나누는 대화, 나에게 묻는 것의 팔할은 '가치관'에 대한 것이다. 사실 결혼에 대한 고민도 애인이 나보다 더 심각하게 했던 것 같다. 애인에게는 나와 결혼을 추진하기 전에는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애인의 인생에서 다소 먼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막상 준비를 시작하며 '나는 결혼할 준비가 된 성숙한 인간인가' '내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걱정,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반면 나는, 사실 애인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결혼은 다소 먼 단어였지만, 우리의 연애와 현재까지 흐름에 있어 많은 것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고 느꼈기에 무언가 애인만큼 곰곰이 사유를 하지는 못했던 것 같은 동시 애인의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아뿔싸 싶기도 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 사람의 문제 해결능력은 얼마인가' '이 사람은 얼마나 나에게 진실된가' 등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막연하게 잘 살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600일이 좀 안되는 기간동안 서로 봐왔던 모습들이 있어 어느정도 우리의 미래의 그림이 그려지면서도, 정작 제일 중요한 가치관 등에 대해서 나는 애인만큼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아 반성을 했다. 결혼생활에서는 연애 때와는 다른 과제들과 질문들이 던져질텐데 말이지..
애인이 묻는 질문들은 우리의 생활용 규칙을 세우기 위한 나의 질문들과 사뭇 달랐다. 가령 아이는 몇 낳고 싶은지, 육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교육에 대한 생각들이 많았다. 종종 아이는 몇을 낳고 싶냐, 그 이유는 무엇이냐에 대한 생각을 묻는 그에게 나는 "현실적인 것을 생각하면 하나 낳아 거기에 집중해서 기르는게 좋겠지만, 또 자녀의 정서적인 것을 생각하면 내가 노산이라도 둘까지 낳아보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답을 했더니 그는 외동일 경우 정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연년생을 키우는 것은 어떤지 등을 묻더니 곰곰이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요즘 재택근무 시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 "그래 애 둘 낳자!!!! 둘 키운다!!" 라고 자기주문을 외치며 일을 한다. (둘=양육비 두배=열심히 돈 벌어야함)
자녀의 교육에 있어 애인의 질문들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아이가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안 하면 어떡할 것이냐,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나의 대답은 '글쎄'였다. 아이를 낳으면 유학을 보내고 싶은지, 보낸다면 왜 보내고 싶은지, 어떤 부분이 나의 유학생활에서 좋았는지 묻는 그를 보면서도 '아니, 벌써부터 저런걸 걱정한단 말이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어쩜 이러한 '가치관' 관련한 문제가 결혼 생활을 앞두고 더 중요한 것일텐데 내가 너무 일차원적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집안의 고유의 문화와 분위기가 있는데, 내가 자란 가정의 환경은 양가 모두 돈, 외모 이런 것 보다도 명예와 학벌 같은 것등을 중요시 하는 집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인품!) 좋은 학교를 나오는 것은 "나는 동양인이야"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매우 당연한 분위기였고 나는 커서 교수나 비슷한 직군의 무엇이 되어야하는 것이 너무나도 정해진 태씨 집안 자녀의 수순(?)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입시를 치루지 않았던 내게 어깨 너머로 알게 된 '한국 입시'의 전부였던 친척들을 보면 우리 가족의 일원이라면 서울대학교나 연세대학교, 혹은 이모, 고모, 큰어머니 그리고 우리 엄마가 나온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 같았다.
나는 서울대학교가 그리 들어가기 어려운 곳인지 몰랐고, 여름방학 때 한국에 들어왔을 때 만났던 친구들이 왜 그렇게 입시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지, 왜 전교 10등 안에 들었던 나의 옛 단짝이 본인이 원했던 학교로 진학을 하지 못한 후 나와 연락을 끊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다 크고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많은 것들을 알게 된 후 돌이켜보면 어쩜 나처럼 반골기질을 지녔고 (나는 학창시절에 내가 싫어하는 과목 - 예:수학 -의 시험지 위에는 그림을 일부러 그려서 냈고, 선생님이 마음에 안들면 일어나서 따졌다) 주입식 교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한국에서 입시를 치뤘다면, 나 역시 가족의 당연한 기대치에 부응을 하지 못했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나 역시도 이를 갈고 어려운 대학에서 학업을 마쳤지만, 동시에 당시 막연하게 학벌을 너무 중요시 하는 분위기가 팽배 되었던 친척들이 모여있는 집안 분위기에 반감을 크게 가지기도 했다. (지금도 그러한 개념은 좋아하진 않지만, 집안 내에서 그런 분위기는 전보다 많이 사라지기도 했다)
반면 애인은 대놓고 '나는 공부를 안 했어'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서울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동네 중 하나인 목동에서 자랐는데, 나보다 반골기질이 더 심했던 (그는 누가 본인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는 학구열이 폭발하는 동네에서 학원 대신 노래방에 가는 것을 즐겼고, 목동이라는 동네 특성 상 성적이 좋지 않으면 아예 학급에서 '중요시 해주지 않는 것' 자체가 싫어 더 공부를 안했던 것 같다. 나는 애인을 일을 하다 만났기에 그의 기지나 이해력 등을 보며 머리가 참 좋다 생각을 했었는데, 머리가 좋은 것과 학창시절의 성적 (학생의 성실도와 무거운 엉덩이의 진득함이 중요한 듯)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하간에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는 나보다 우리의 자녀의 교육에 대해 관심이 더 높았던 것 같고 나의 가치관이 더 궁금했던 것 같다. 우리는 많이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그는 내가 공부와 학업을 중요시 하는 집에서 자란 것을 아니까. 뭐 나의 생각은 나올 수 있다면 좋은 대학을 나오면 당연 좋겠고, 그만큼의 네트워크나 사회생활을 할 시 수월함이 조금 더 주어지겠다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애인은 우리의 아이가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나는 사실 공부도 공부지만 요즘 세상에선 예체능 중 하나를 특출나게 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요즘에는 우리의 결혼 관련 가치관을 알기 위해 '결혼 테스트 100제' 라는 것을 구매해서 일주일에 한 챕터씩 풀어보고 있다. 평소에 나누는 대화 외에도 우리가 결혼생활, 부부생활, 그리고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꺼리인데, 문항을 풀고 서로 문답지를 바꿔 보는 것이 참 재미있다. 이 문답지를 풀며 서로 느낀 것은, 우리는 '스트레스를 푸는 법' 그리고 '타인과 갈등을 해결하는 법' 외에는 거의 다 다른 가치관을 지녔다는 것이다. (^^;;) 애착유형 검사를 했을 때도 둘 다 비스무리한 유형이 나와서 웃겼는데, 그 것의 연장선상인 문제해결방식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같아서 더욱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각자 다른 답변을 보며 서로에 대해 더 배워가고 이해할 수 있는지라 많은 예비부부들에게 추천한다.
결국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맺는다는 것이고 하물며 직장에서도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끼리 더 결속력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애초에 가치관에 대해 사전에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내가 잘 몰랐던 것 같다. 애인 덕분에 나는 우리가 "어떻게 체계적으로 잘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서로 융화하며 잘 살 것인가"에 대해 더욱 더 고민을 하고, 맞춰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요즘 이 사람과 결혼하기로 한 것은 참 잘 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