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슬픈 9월

세 번의 장례식, 그리고

by Nara Days

9월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달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의 시작이기도 하며 밴쿠버에서 새학년을 시작할 때의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도 하고, 엄마의 생일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나만의 이상한 편견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9월에 태어난 사람들의 성격을 좋아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위험하지만, 내 느낌에는 대부분 이상하리만큼 깔끔하고 정확하다.


올 해 9월 역시 가득찬 설레임으로 시작했다. 9월이 되자마자 남편이 예약해둔 오마카세에 가서 엄마의 생일을 함께 축하했고, 남편의 귀여운 카드 덕에 엄마의 기분은 더 좋아지셨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라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라니.. 그 멘트가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엄마의 생신을 보낸 날 나는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친정에서 잠을 잤고, 뜻밖의 손님 덕에 우리 집 장군이 (9살 비숑프리제)는 너무 신나서 계속 왕왕 짖고 뱅글뱅글 돌았다. 남편이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을 아는 것 마냥 남편의 냄새를 맡고, 또 어느새 보이지 않아 어디갔나 싶어 찾아보면 남편과 같은 이불속에 들어가서 누워있었다. 참으로 웃긴 아이다.


그 다음날은 친가댁과 함께 성묘를 갔다. 나는 결혼을 새로 하고, 사촌 오빠는 재작년 결혼을 하고 아이 아빠가 되어 아이와 함께 와서 갑작스레 가족이 커져서 또 새로운 느낌이 났다. 유난히 청명한 하늘 덕에 성묘길은 기분이 더더욱 좋았다.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큰할아버지 및 친척분들께 차례대로 인사를 드렸고, 남편은 새 일원인만큼 잔을 열심히 올렸다. 나는 남편이 우리 가족에 온게 참 좋았다. 단순 나와 결혼을 한 사이 뿐만 아니라, 뭔가 이 작은 공동체에 일원이 되어 함께 한다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성묘 후 우리는 분당으로 올라와 오래된 중국집에서 한상 가득 밥을 함께 먹었고, 아직 갓 돌이 안된 조카의 통통한 종아리와 하찮고 귀여운 앞니에 몇 번을 웃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앞으로의 우리 향후 몇년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꽤나 현실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남편과 나인지라, 새삼 누군가의 육아를 눈 앞에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9월의 첫주 주말은 꽤나 화기애애하고 행복하게 흘러갔다. 다만 성묘하러 내려가는 길에 엄마는 전화 한통을 받았고, 요양병원에 들어가신지 얼마 안된 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리셨는데, 첫 3일은 괜찮으시다가 갑작스레 호흡이 안 좋아지셨다는 소식이었다. 엄마는 분당으로 올라오자마자 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로 병원으로 넘어가셨다.


그러고 몇일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몸이 워낙 안 좋으셨고 연로하셨기에 어느 정도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만, 코로나가 사인이 될 줄은 몰랐다. 조금이라도 다행인 것은 내가 그 날 낮에 전화를 해 요양사분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기 위해 귀 옆에 수화기를 대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었고, 할머니의 답변을 듣진 못했지만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간에 태풍이 올 무렵, 그리고 추석 연휴 전, 나는 사랑하는 할머니를 보내는 시간을 가졌다.


무언가를 추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여러 사진을 보고 곱씹는 시간을 가진다. 내가 지닌 할머니, 그리고 작년 말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들을 보면서 가족들과 추억들을 나누었고 무엇보다 누구보다도 제일 힘들 엄마의 힘이 되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연로해지신 시점부터 근처로 이사가 병원을 모시고 다니고, 매 주 맛있는 것을 해서 갖다 드렸다. 나 역시도 가급적 본가에 갈 때 한 달에 한번씩은 꼭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뵈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더 노력해서 더 찾아뵐 수도 있었을텐데 싶어 마음이 아팠다.


엄마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천천히 해왔을테지만, 나는 할머니를 잃은 반면 엄마는 본인의 엄마를 잃은 것이라 감히 그 슬픔의 깊이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3일의 장례 기간을 보내며, 나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고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했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으리라 깊게 다짐했다.


여담이지만 외할아버지는 작년 아빠의 생신 당일 돌아가셨는데, 올해 할머니는 엄마의 생신날 입관을 하셨다.


아름다운 할머니, 사인이 코로나라 원래 모시려고 한 병원에서 모시지 못하고 작은 병원에서 장례를 치뤘다
할머니는 화가셨다. 각종 그림, 부채, 도자기로 가득한 할머니의 방을 보는 것은 작은 갤러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2003년 쯔음인가, 할머니와 우크라이나 키예프 부근의 강가에서 피크닉을 하던 때
할머니는 작년 말 돌아가신 할아버지 옆에서 편히 잠드셨다.
현충원에 간 김에 할머니의 오빠 (우리 엄마에게는 외삼촌)의 묘지에도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발인 후 다음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나의 결혼식에서 웨딩마치 때 플라워샤워까지 해준 아끼는 친구가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엉엉 울었고, 추석이라 지방에 내려간 남편이 올라오자마자 (내가 맘이 힘들 것 같아 이번에 시어머니께서 같이 큰집에 내려가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해주셨다) 상가집을 갔다.


처음 뵈는 친구의 어머님 아버님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친구들이라도 딸의 몫까지 더 행복하게 살라는 아버님의 말씀이 참 아팠다.


친구가 내년에 결혼을 하고, 어떤 형태의 결혼을 할것이며 그 후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장례식장에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약혼자분을 보니 가슴이 저며왔다. 누구보다도 이타적이고 따뜻하며 그릇이 컸던 친구이기에, 그 친구가 나누어준 사랑만큼 많은 사람이 비통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그녀의 기억들이 하나같이 따뜻하고, 또 "어쩜 저렇게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있을까"의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워낙 인권 운동, 동물 권리 활동 등을 많이 해온 친구인지라 그 동력 등을 물었을 때 그녀의 답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진작에 친해졌음 좋았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오래 보자라고 답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슬펐고 정말 진작에 밥 한번 더 먹고 더 친해질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참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친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고 몇일 뒤, 또 다른 아끼는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비가 많이 오는 금요일, 나는 일을 마치고 분당으로 향했다.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 택시를 기다리며 흠뻑 젖었지만, 늦지 않게 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고, 마침내 닿은 식장 안에서는 많이 울어 눈의 실핏줄이 터져있는 친구가 나를 보며 또 다시 눈이 빨개졌다. 나는 친구를 한참 안고 울었고, 친구의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묵념을 하고 기도를 한 후, 식장에서 한참 식사를 하고 나왔다.


맑고 고운 영혼을 가진 친구가 천천히 잘 회복하길 바란다.


나에게는 모쪼록 힘들고 슬픈 9월이었다. 그에 비해 하늘이 참 청명하고 맑아 야속할 정도였지만, 어쩌면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오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에 이 슬픔을 잘 받아들이고 나 역시도 그만큼 나중에 더 커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부디 모든 유가족들이 천천히 잘 회복하기를 바라며, 모두에게 사랑이 깃드는 남은 가을이 되기를 바란다. 나도 아주 조금씩 힘을 내어 천천히 일상으로 복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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