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진료 - 11월 6일 화요일
오전에는 3주 만에 정신과에 다녀왔다. 원래는 격주로 방문하는데, 최근 무력감이 심해져 지난주에 병원을 방문하지 못했다. 2주 치 약은 3주가 되도록 한 움큼 남아있었다. 아마도 약의 부작용인 변비는 많이 사라졌다. 다시 약을 꼬박꼬박 먹으면 변비에 걸릴까? 싫다.
흐린 날이라 두통이 있었다. 원래부터 흐린 날엔 컨디션이 안 좋았다. 저혈압일 땐 더 심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두통이 있고 눈이 뻑뻑한 정도. 두통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한쪽 눈의 시력이 떨어져 상이 겹쳐 보였고, 날까지 흐리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지금의 시력 차이에 익숙해지고, 날이 맑아지면 두통도 사라지겠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습관처럼 받지 않았다.
엥.
일년 전 쯤 통화를 한 것 같다. 아빠의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바뀐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걸 까먹은 사이 나도 핸드폰을 바꾸게 되었다. '뭐,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고모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데, 아빠 대신 엄마 가게에 찾아가서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한다. 엄마한테도 전화가 왔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쿵쿵- 까지는 아니었다. 아빠랑 할 말 없는데. 다시 전화를 걸기야 하겠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짜증이 났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동네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처방전 등을 주고 나오는 길에 (경우에 따라 외래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전화를 걸었다. 나는 몸이 안 좋아 한국에 돌아왔다고 했다. 아빠는 너 뇌가 아프냐? 고 했다.
응, 뇌가 아파. 당신이 연락을 하는 바람에 좀 더 아파진 것 같아.
우울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이해 못하는 사람이래도 아무 상관 없을 정도로 내겐 타인과 같은, 타인보다 못한 사람이다.
무덤덤하게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싶었다가 그러면 내가 그 뒷수습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마저도 싫어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뭐, 복권이라도 당첨돼서 연락하는거면 모를까. 그 외엔 흥미조차 없었다.
화가 난다고 했다. 어째서? 그 말에도 나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괜히 울컥하거나 속상하거나 화라도 나면 피곤하니까.
다음 주에 얼굴을 보기로 했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한담. 이쪽의 얘기를 자세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도 귀찮게 군다.
엄마가 고모가 찾아와서 내 연락처를 알려줬다고 했다. 응, 그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내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고 지냈어야 하는걸까? 모르겠다. 할아버지, 큰아버지 모두 싫어하지 않았는데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두분 다 믿음이 신실하셨으니 천국에 잘 가셨겠지, 뭐.
엄마가 아빠가 어떤지/어땠는지를 물었다.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내가 뒷수습 해야 하잖아. 죽는 것도 싫어. 그냥 아무 관심 없어.
엄마는 이제라도 무슨 얘길 해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나는 그제서야 성질을 부렸다.
그런건 15년 전 쯤에 했어야지.
나는 지금 한국 나이로 서른이다. 아비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국에서 사업을 한답시고 집에 없었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일 년에 두어 번 볼 수 있었고 집에는 한 푼의 돈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스물 한 살이 되자 이혼했다.
십대때 아비가 집에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예민한 성격에 견뎠을리가 없다. 내 우울증은 어려서부터 있었던 듯 한데, 아비가 같이 살았다면 아주아주 안 좋았을 것이다.
'왜 그렇게 아빠가 싫어요? 돈을 못 벌어오는 것 때문에?'
얼마 전 지인에게 들은 질문이다. 내가 그 사람이 죽는 것 조차 싫다고 말하자 물었다.
별로 대답하고 싶은 질문은 아니었다. 예전만큼 그 이유가 뚜렷하지도 않다. 화가 나지도 않고 이제 그냥 잊었다. 잊고 싶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없는 것'이 되길 바랐다.
내일이면 날도 맑아지고 몸살 기운도 사라지고 두통도 가라앉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