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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Oct 25.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8장: 트랜스 모먼트

나를 다시 마주한 순간

[8장: 트랜스 모먼트]


그래서 나는 무성애자인가? 하고 고민하던 즈음에, 좋아하는 남자 아티스트가 생겼다. 처음엔 노래가사의 메시지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는데, 보다보니 멋지고, 잘생겼고, 그러다보니 설렜다. 그의 모든 곡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서 매일같이 들었고, 그가 나왔던 티비프로나 유튜브 영상을 다 챙겨보고, 앨범을 사고 콘서트를 가고 팬들과 소통하며 짤을 모았다. 핸드폰 및 노트북 배경화면, 카카오톡 프로필 배경화면, 컬러링 모두 그였다. 뭐 덕질의 세계에서는 이 정도 쯤이야 라이트한거겠지만 남성인 사람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나는 남자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건가? 양성애자일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나의 성적지향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인가’로 넘어오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남자’ 라는 것, 따라서 남자로서의 역할수행을 해야된다는 것이 되게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성애 연애관계에서도 아무래도 ‘남자친구’ 와 ‘여자친구’ 로서의 관계맺음을 하는 것이니, 비단 스킨십 뿐만 아니라 미묘하게 불편한 지점들이 생겨났다. ‘남자’로서의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것이.

그래서 어느 여름날 무지개깃발을 들고 여자친구를 찾아가 커밍아웃과 함께 깔끔히 이별을 고했다.

물론 뻥이고, 어쨌든 당시 여자친구와는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다. 1년 반 정도 만났었는데, 서로 고마웠었다는 말을 하고 잘 마무리했다.     


아까 위에서 말한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은 페미니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숭배해왔던 남성성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뒤로는 그 반대급부로 남성적이지 않은 것, 사회에서 여성성으로 분류되는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무뚝뚝하지 않고 상냥하고 다정한 것, 둔감하지 않고 세심하고 예민한 것, 이성보다는 감정을 중시하며 대화할 때 살대방의 기분을 민감하게 캐치하고 배려하는 것 등등 말이다. 과거 맨박스에 절여져있던 나는 그런것들은 여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평가절하했으나 페미니즘을 만난 이후로는 그것들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대화하는 방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헤테로(이성애) 연애를 끝내고 난 뒤, 그 관심의 전환은 외형적인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왜 ‘예쁨’ 이라는 것은 여성젠더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거지? 남자는 예쁠 수 없나? 남자는 꼭 울퉁불퉁 근육에 털 수북하고 우악스러운 모습이어야 ‘상남자’ 인건가? 여자는 치마도 입고 바지도 입는데 왜 남자는 바지밖에 못 입는가? 남자가 화장하고 꾸미면 왜 ‘게이같다’ 라고 조롱을 받는가? 등의 여러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여성들은 저렇게 화장하고 꾸미고 나오는데 남자들은 너무 편하게 나오는거 아닌가?’

‘여성들은 (사회적 영향으로) 자기검열도 많이하고 사람을 대할때도 조심스러워하는데 거 남자들은 너무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무례한 사람들이 많은거 아닌가?’

나는 이러한 불편감이, 단순히 페미니스트로서 느끼는 불평등에 대한 감각인건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건지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무언가’ 가 있는게 맞다는걸 알게되었다, 그걸 우리는 ‘성별정체성’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죠?



화장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으로 사회화되면서 화장의 ㅎ자 근처에도 못가봤다. 너무 편하게 살아온 것이다(하하..). 나는 조금 행동파 기질이 있어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다. 바로 메이크업 강의를 신청했다. 어떤 스터디룸 같은 곳이었는데, 강사님은 온갖 종류의 화장품으로 가득찬 캐리어를 질질 끄고 나타났다.

스킨로션,썬크림,수분크림,파운데이션,컨실러,모공프라이머,눈썹정리칼,아이브로우,아이섀도우,아이라이너,뷰러,마스카라,블러셔,쉐딩,하이라이터, 그리고 마무리로 립. 숨찬다 숨차 헉헉.

로션도 잘 안바르던 뉴비가 한번에 이 모든걸 숙지할 수 있을 리가. 용어부터가 생소했다. 무슨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그리고 뷰러는 눈 찝힐까봐 무서워..

당연히 배운걸 100프로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얼레벌레 찍어바르고 다녀봤다. 귀걸이,목걸이,팔찌,반지 등 반짝이는 악세서리도 해봤다. 그러고서는 sns에 사진을 올려봤더니 사람들이 예쁘다고 해줬는데, 그 말이 기분이 좋았다. 오히려 ‘잘생겼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화장품과 악세사리가 하나둘 쌓여갔다.

‘예뻤던’ 나는 편견어린 시선도 받긴했다. 당시 새롭게 찾아간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나보고 혹시 동성애자 아니냐고 물어봤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오기전에 그 교회에서 안그래도 ‘게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더란다. 그런데 그때까진 남성패싱이었던 내가 입술 빨갛게 칠하고 가니까 ‘혹시 소문의 그 게이가 저 사람?’ 이렇게 웅성웅성이 되었던 것이다.

뭐 딱히 나를 해코지하려고 물어본건 아니었지만 고작 화장 좀 했다고 이렇게 주변에서 호들갑을 떠는게 기분도 안좋고 답답하기도 하였다.

잠깐 알바를 다녔던 곳에서는 사장이 나에게 대뜸 “성정체성이 뭐에요?” 라고 물어보기도 하였고, 버스에서는 웬 아저씨가 나에게 “남자가 왜 립스틱을 발랐느냐”며 삿대질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더 가고 싶었다. 나를 찾는 여행인데 누가 내 앞길을 막을쏘냐.

마침 그때 sns에서 어떤 남성모델분이 크로스드레싱을 한 사진을 보았다. 평소에도 멋지다고 생각했던 분이었는데, 흔히 사회에서 하는 희화화된 ‘여장’ 이 아니라 제대로 꾸미고 제대로 갖춰입은 멋진 사진이었다. 그걸 보니 나도 치마를 입어보고 싶었다. 그 모델분만큼 멋지지는 못하겠지만 시도만으로도 해방감이 들 것 같았다. 내 정체성 여행을 지지해주던 주변 지인 중에서 옷을 빌렸다. 사진작가 분과 약속을 잡고 스튜디오를 대여했다. 안경벗고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하고, 빌려온 몇 종류의 ‘여자옷’들을 입고서는 카메라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잡아봤다. 그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어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의 트랜스 모먼트


그 때 뭐랄까,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직관적인 느낌으로 딱 와닿았던 것이다.

‘아 이게 내가 원하던 나의 모습이구나’ 하고. 누군가 나에게 종종 ‘계기’를 물어오면 이때의 순간을 얘기하곤 한다. 이것이 나의 ‘트랜스 모먼트’ 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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