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수 Oct 27. 2023

<나의 트랜지션 일기> 10장: 진단서를 받다

"어렸을때부터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10장: 진단서를 받다]


나는 뭘까.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고 검열하는 시간을 보냈다. 머리로는 성별정체성 영역에서의 소수자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사람이라는걸 알았지만, 막상 내 문제가 되니 불안하고 괴로웠다. 그동안 사회에서 접해왔던 수많은 혐오표현들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내가 정신병인걸까, 성도착 변태인걸까, 잘못된거라면 치료받고 고치고 싶었다. 조급한 마음에 다니던 회사에 연차를 내고, 괜찮다고 알려진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선생님한테 나의 상태? 증상?을 말하고, 이게 잘못된거라면 고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두근두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고칠 수 있을까? 고쳐야 할까? 그런데 의사선생님은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 했다.

“그게 왜 잘못된거에요? 연수씨가 그걸 원하면 그렇게 사는거죠.”

순간 머리 한 대를 띠잉 맞은 것 같았다. 아, 그냥 원하는대로 살면 된다고? 하하. 뭐야 고처야되는게 아니었네. 무슨 말을 들을지 엄청 긴장하고 갔는데 저 한 마디로 정리되니 약간 허탈하기도 했다.      

mtf나 ftm같은 트랜스젠더가 호르몬치료를 받으려면 우선 정신과에서 ‘성 주체성 장애’ 라는 진단을 받아야 한다. 질병코드 ‘f64’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내가 찾아갔던 곳은 퀴어 프렌들리한 편이라고 알려진 병원이라 크게 편견이나 차별적인 시선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자마자 바로 진단서를 떼주진 않았다. 병원에서는 어쨌든 환자로서 여러번 상담도 해보고 검사도 해보고 그래야 의학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거니까.

당시 나는 우울증도 있었기 때문에 의사선생님은 우울증 치료부터 먼저하고 우울증이 조금 나아지면 그때 한번 심리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검사해야 더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지 않겠냐는 거였다. 얼른 호르몬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몇 달간 꾸준히 병원을 다니며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우울증 치료 받는 중에도 드문드문 성별정체성 관련 질문도 하셨는데 나의 정체성에 얼마나 확신이 있는지, 흔들림은 없는지를 확인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달 간 꾸준히 병원 다니고 상태도 조금 호전되자 성 주체성 장애 진단을 위한 검사를 받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를 위한 검사가 따로 있는게 아니고, 종합심리검사를 통해 그 사람의 전반적인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검사 중간중간에 성별정체성이나 성역할 관념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당위적인 접근은 배제하고, 그냥 순전히 나의 직관에 따라 답변하려고 노력했다.

예를들면 여성은 어떠어떠하다 라는 문장에 대해서, 여성주의적으로서는 옳지 않을 수 있어도 그냥 내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직관적으로 드는 느낌에 따라 답변했다. 그래야 정확하게 나올 것 같아서다.

종이로 된 검사지를 풀고 나서는 그 검사를 진행하시는 검진의 분과도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쨌든 내가 호르몬치료를 받고싶어하는 사람이니까, 성별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언제부터 여자가 되고 싶었냐, 어렸을땐 어땠냐, 어렸을때부터 여성스러웠냐, 여성 하면 뭐가 떠오르냐, 뭐 이런 질문들. 트랜스젠더가 성별이분법과 성역할 고정관념의 압박을 많이 받는다고 듣기만 했는데 내가 직접 겪게된 것이다. 

나는 위에서 적었듯이, 어렸을때는 남자답고 싶었기 때문에 여성스러운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가지면 더 놀림받고 괴롭힘 당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검진의의 질문에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그런 질문들 자체가 답이 정해져있는 것 같았으니까. 어렸을때부터 분홍색,화장,인형놀이를 좋아했고 남자들이랑 못 어울렸고 어쩌고 하는 트랜스젠더서사의 클리셰에 부합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나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제대로 진단을 안 내려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진실의 기반 위에 적당히 거짓말도 좀 섞었다. 

저는 어렸을때부터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라고.



병원가기 전 한창 고민하고 힘들었던 시기에 1년정도 심리상담을 받았었다.  


그러고 나서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념을 물어보는 질문도 있었다.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당위적으로 보자면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어떻다’ 라고 규정짓는 것 자체가 성차별적인거고, 사람마다 특성이 다 각각 다를 것이기에 성별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도 그렇게 대답할 수 없지 않은가. 여자로 살고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중립적으로 얘기하면 “그럼 왜 굳이 여자가 되고 싶으세요?” 라는 말이 돌아올게 뻔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드는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남자는 뭔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고 거칠고 투박한 느낌인데 여자는 부드럽고 섬세하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여리여리한 느낌이다, 뭐 이런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검진의가 “저도 여잔데 저는 안그래요, 여자라고 다 그렇지는 않은데요” 라고 하더라. 너무 억울하고 기분이 나빴다. 아니 자기가 여자고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뭐 어쩌라고? 나는 당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일반’에 대한 관념을 얘기한거라고. 근데 그 말이 왜 나와. 그러고는 나중에 결과지에 ‘성별에 대해 편향적인 고정관념이 있음’ 이런식으로 적어놨더라. 아 이러니까 트랜스젠더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말이 나오지. 그래도 뭐 별 수 있나. 내가 호르몬치료를 받으려면 이 사람의 판단이 필요하니까. 내가 아쉬운 ‘을’ 의 입장이니 기분나빠도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수모를 참아내고 결국 진단서를 받아냈다.    


'상세불명의 성주체성장애'. 저 장애라는 말의 함의에 대해서 생각해볼게 많은것 같다.


병명: 상세불명의 성주체성장애  

소견: 할당된 성 역할에 대한 불편감 및 성적지향의 불일치로 인한 고통이 상당기간 지속되어온 상태이며, 현재 대체적인 성별로의 전환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심리검사 및 정신과적 면담을 통한 평가상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으로 판단되지는 않으며, 호르몬 치료를 포함한 대체적인 성별로의 전환과정이 환자의 우울감 등을 개선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진단서를 받아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나의 내면적 고통이 드디어 공적으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막연히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면되지’ 라는 말을 듣는거와는 다르게 전문 의료인이 진단서를 딱 써주니까 내 존재가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이걸로 호르몬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구나.   




작가의 이전글 <나의 트랜지션 일기> 9장: 남자는 아닌 무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