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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Jan 08.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43장: 연애 각본

어떤 역할이신가요

[43장: 연애 각본]



어떻게보면 성역할규범이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관계가 (이성애)연애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서는 남자친구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하면 여자친구는 저러저러한 것들을 한다 같은게 정해져 있고, 그런것들을 잘 못하거나 안 하면 매력이 없거나 애정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가 정체화하기 전, 남자로서 여자와 연애할때는 그 ‘남자친구로서의 역할’이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다가왔었다. 상대는 나에게 데이트 과정에서 무언가 리드를 한다거나, 보호해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원했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통해서 남성다움에 대한 강박을 많이 벗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연애관계에서 상대여성이 나에게 ‘남자로서의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이 느껴질 때는 무언가 불편함과 버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스킨십 부분이 제일 어려웠고, 나는 내가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지나고보면 그때 느꼈던 미묘한 불편함이 내가 나의 성별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데에 많은 영향을 줬던 것 같다.     


트랜지션 이후에는 여자로서 남자를 만나보고 싶었다. mtf를 여자로 생각하는 남자는 별로 없고, 더군다나 연애대상으로 생각하는 이성애자 남자는 더더욱 없다. 여성이라고만 밝혔을 때는 호의적이었던 남자들도 트랜스젠더라는걸 듣고나면 태도가 차갑게 돌변하거나 연락을 끊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해서 안 밝히고 있다가 나중에 드러나면 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수는 없었다. 사람을 만나는 어플에서는 아예 소개글에 적어놓았다. 트랜스젠더여도 괜찮다고 하는 남자들을 몇 번 만나보았다. 여자로서 남자를 만나는건 확실히 남자로서 여자를 만날때와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상대방이 나를 ‘여자로서’ 좋아하는거니까, 나에게 여자로서의 성역할을 당연히 기대할거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말투나 행동을 ‘여성스럽게’ 하려고 애썼다. 꾸미고 나가서 상대남자가 내 외모를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도 있었다. ‘내가 예뻐보여서 좋아하는 거라면, 안꾸미고 나오면 싫어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내 취향이 아닌 사람이라도 일단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호감은 어떤 기대나 요구로 다가와서 부담이 되었다. 노골적으로 성적인 요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연락을 끊었다.      


나를 계속 만나고 싶어하면서도 딱히 별다른 요구가 없었던 사람을 몇 번 만난적이 있다. 그 사람은 나를 만날때마다 차를 끌고 내 동네로 데리러 왔었고, 내가 가고싶어하는 곳, 먹고싶어하는 것, 갖고싶어하는 것을 계속 물어보며 나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아무리 나에대해 직접적인 요구가 없었다지만 그래도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그 사람도 나에게 원하는게 있으니 잘해주는 것 아니겠나. 아니나다를까 만남이 반복되자 그 사람은 나에게 “우리 무슨 사이야?” 라고 물어왔다. 만날때마다 스킨십은 있었지만 나는 전혀 연애감정이 없었고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내 취향이 아니라서인것도 있지만 연애관계에 들어가서 누군가의 ‘여자친구’역할을 한다는게 몹시 피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을 하느니 그냥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게 훨씬 편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입장을 완곡하게 전달했고, 그 사람과는 그렇게 멀어지게 되었다.      


상대가 나에게 돈을 쓰는데 내가 온전히 상대의 (연애적,성적)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상황을 겪어보니 내가 소위 말하는 ‘어장관리’ 나 혹은 ‘김치녀’ 같은 짓을 한건가? 싶어서 약간 찜찜하기도 했다. 근데 한편으로는 상대가 자꾸 만나자고 해서 그 제안에 수락했을 뿐인데 그게 잘못이라고 한다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이 ‘김치녀’ 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고 있고, 여자가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한 남자의 사건도 접한적이 있어서 무서웠다. 만남을 더 이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그들이 원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했다고 해서 범죄피해를 받지는 않았으니 나는 운이 좋았던 셈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남자 입장에서의 연애와 여자 입장에서의 연애를 모두 경험해보고 나니 연애관계도 일종의 각본이라는게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우리가 온전히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로서 관계맺고 있는 것 같지만,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남자친구로서 혹은 여자친구로서 어떠어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규범으로부터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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