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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Jan 04.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42장: 성적 지향

동경이냐 끌림이냐 

[42장: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성적 지향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둘은 엄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성별정체성이 ‘내가 누구인가’에 관한 문제라면 성적 지향은 ‘나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가’에 관한 문제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여성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고, 레즈비언은 자신이 여성이면서 여성에게 (연애적·성적)끌림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 여성 중에서도 레즈비언이 있을 수 있고, 트랜스젠더 남성 중에서도 게이가 있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혼란과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기 이전에는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애중심적인 우리 사회에서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디 문제가 있는것처럼 여겨지니까. 이성에 대해 느끼는 좋은 감정은 다 연애감정으로 환원되고, 동성에 대해 느끼는 연애감정은 그저 진한 우정이나 어린 날의 치기로 치부되곤 하니까.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친했던 남자애랑 손잡고 복도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왜 그랬을까. 아이들이 수군댔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의 나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좋아했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와 날씬한 몸을 가진, 청순하고 상냥한 여자. 티비 속 인물로 치면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가인이나 ‘건축학개론’의 수지 정도 되겠다.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이누야샤의 금강(키쿄우)를 정말 좋아했다. 몹시 부끄럽지만 초등학교 때 금강의 연적인 가영(카고메)을 좋아하던 친구랑 싸운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의 여성인물들을 좋아했던 내 감정이 꼭 연애감정이나 성애적인 것 뿐만 아니라 동경심도 섞여있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내가 정체화를 한 이후에 추구했던 모습들이 어렸을 때 내가 좋아했던 여성상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비운의 무녀 금강(키쿄우). 많은 남성들의 심장을 떨리게 했으리라.


나는 성별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경험을 통해 ‘로맨틱한 끌림은 남성에게 느끼고, 성적 끌림은 아무에게도 느끼지 않음’ 이라고 한 때 나의 성적 지향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트랜지션을 시작한 이후로는 또 헷갈리는 부분이 생겼다. 내가 여성에 대해서 느끼는 좋은 감정이 동경인지 끌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예쁘거나 멋진 여성들을 볼 때 ‘내가 저 사람처럼 되고싶은건지’ 아니면 ‘저 사람과 같이 있고싶은건지’는 분명히 다른거 아닌가? 근데 후자일 때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동경이기만 한건지 혼란스러웠다. 물론 지금은 그 두 가지를 꼭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한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감정 모두 느낄 수 있는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 두 가지를 꼭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성에 대해서는 끌림을 느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트랜스여성이 여성을 좋아한다고 하면 정체성을 의심받을거 같으니까, “그냥 남자라서 여자 좋아하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까봐. 그리고 뒤에서도 얘기하겠지만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이하는 얘기 중 하나가 ‘mtf 트랜스젠더들이 여성공간에 침입해서 여자들을 강간한다’ 이다. 그런 얘기들의 사실 여부를 떠나, 하도 듣다보니 나도 엄청 자기검열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성에 대한 호감은 비교적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성들에 대해 내가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부러움’ 뿐이었다. 그러니까 예쁜 여자를 보면 (그 외모를)부러워할 수 있고 질투할 수는 있지만 예쁘기 때문에 좋아하면 안될 것 같았다. 반대로 남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도 있는 척하거나 좋은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이 꼭 연애감정이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꼭 남자를 좋아해야만 여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압박이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성확정수술하기 전에는 여성인 친구들과 일상적인 스킨십(팔짱, 포옹 등)을 하는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상대방이 성애적인 접근이라고 여길까봐.  

수술 이후에는 자기검열에서 많이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완전히 편하지는 않다.


나는 지금은 성애적 끌림은 거의 없고, 로맨틱한 끌림은 상대의 젠더에 무관하게 종종 경험할 때가 있지만 그 정도나 빈도가 매우 희미하고, 나의 성향은 1:1의 독점적 연애규범에 그다지 맞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적지향은 ‘무성애 스펙트럼’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것도 바뀔 수 있다. 

나는 나와 같은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성애중심주의의 압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롭게 자신의 성적 지향과 끌림을 탐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정,연애감정,성애,동경,사랑 등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의 결과 폭은 너무나 다양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관계맺을 수 있는 형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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