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수 Jan 01.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41장: 넷카마 모먼트

속으셨군요

[41장: 넷카마 모먼트]



내가 어렸을때는 남자다움에만 집착했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옛날에도 종종 여자가 되고싶었던 적이 있었다. 가장 최초의 기억은 중학생 시절 ‘겟앰프드’라는 온라인 게임을 할 때였다. 맵을 돌아다니며 유저들끼리 서로 격투를 하는 게임이었는데, 약간의 현질을 하면 캐릭터가 쓰는 무기 뿐 아니라 캐릭터의 외모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고르거나 꾸밀 수 있었다. 나는 당시 그 게임에 푹 빠져 있었기에 용돈의 많은 부분을 그 게임에 지출하였다. 처음엔 당연히 남자캐릭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질을 하니까 예쁘고 귀여운 여자캐릭터도 고를 수 있게 되어서 호기심으로 해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딱히 별 생각이 없었는데 문제는 플레이를 하다가 상대방이 나를 ‘여성’으로 대하는 순간을 맞이했을 때였다. 다들 알고있다시피 온라인 게임이라는게 보통 남성유저가 더 많고 특히 겟앰프드는 여성유저가 거의 없었는데도 단지 내가 여성캐릭터를 플레이한다는 이유로, 거기에 더해 말투가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욕설을 안 쓰고 부드럽게 말한다는 이유로) 나를 여성유저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혹시 여성분이세요?” 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왠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는 했다.      


겟앰프드 여캐. 딱 이거는 아니었고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포스트


온라인 공간에서 여자 행세를 하는 남자를 가리켜 ‘넷카마’ 라고 한다. 여장남자라는 뜻의 일본어인 ‘오카마’와 인터넷을 합친 단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온라인 게임이나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여성이라고 밝히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관심과 호의, 때로는 심지어 심지어 물질적 혜택까지 제공받기도 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종종 성별을 속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여성인줄 알고 잘해줬더니 알고보니 남자였다, 속았다’ 라는 피해(?)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여 넷카마는 하나의 밈이 되었다. 


나의 겟앰프드 이후의 기억은, 이름은 밝히기 싫은 어떤 남초 커뮤니티에서의 기억이다. 그 때도 처음엔 의도치 않게 여성스러워 보이는 닉네임과 프로필사진을 사용해서 활동을 했는데, 내가 말투도 거칠지 않으니 사람들은 나를 자연스레 여성으로 인식했다. 남초 커뮤니티는 특성상 남자들의 주 관심사(게임,군대,자동차,여자 등)에 대한 글이 많이 올라오는데, 다들 알고있다시피 그다지 따뜻한 분위기는 아니다. 유머있고 재밌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서열을 나누고 조롱과 비하를 할 때가 많다. 그런 곳에서 여성으로 보이는 유저 하나가 상냥한 말투로 여기저기 댓글을 달고다니니까 그들에게는 아주 신선했나보다. 많은 유저들이 폭발적인 관심과 호응을 보였고 나는 의도치 않게 네임드(!)가 되었다. 졸지에 여성성을 수행하게 된 나는 그들로부터 천사(...)로 추앙을 받았고 간혹 남친이 되고싶다는 집적거림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oo님 남친지망생’ 이라는 닉네임을 만들고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속이 안좋네..     


게임에서도 그렇고, 커뮤니티에서도 그렇고, 나는 ‘여자 행세’를 한 경험은 있지만 여느 넷카마와 달리 내가 실질적인 이득을 챙긴건 없었다. 가끔 뉴스를 보면 채팅어플 같은 곳에서 여자라고 속인 뒤 만나줄 것처럼 하면서 금전을 갈취하는 경우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자가 안달하며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마지막에 “나 남자였지롱” 하고 도망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런데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넷카마와는 조금 다른 유형인 것 같았다. 나는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고, 마지막에 남자라고 밝혀서 골탕먹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끝까지 여성으로 남고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여성으로 대할 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미묘하고 야릇한 쾌감이 있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그냥 내가 변태인건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경험 역시도 정체성의 영역이었던 것인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별에 있어서 속이는건 뭐고 속는다는건 뭘까. 내가 여자라고 ‘속인’ 상대방에게 평생 들키지 않았다면 결국 나는 그 사람에게 여자였던 것이다. 결국 성별이라는건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상대방에게 어떤 기대와 욕구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휴재 공지] 독자님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