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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Apr 01.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54장: 화장실은 누구를 위해

두 개의 문 앞에서

[54장: 화장실은 누구를 위해]



어느 건물을 가든 반드시 있는 공간이 있다. 여기를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어디일까? 바로 화장실이다.

학교, 회사, 병원, 은행, 마트, 지하철역 등등. 사람이 다니는 곳엔 그 어디든 화장실이 있기 마련이다. 배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화장실이라는 공간은, 배설하는 모든 인간이 다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선택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배설하기에 앞서 우리는 항상 두 개의 문 앞에 놓인다.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이라는 두 개의 문 말이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이렇게 두 성별로 나눠진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에 불편감이나 거부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바로 선택받은 사람이다.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성별과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하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던 거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시스젠더(cis-gender)'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정받은 성별과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즉 트랜스젠더는 두 개의 문 앞에서 심리적 장벽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왜 나는 남자/여자일까? 왜 나는 남자/여자로 불려야 할까? 왜 나는 남자/여자로 보이게끔 행동해야 할까? 왜 나는 남자/여자 공간을 편하게 쓸 수 없을까?’ 하는 의문들. 그리고 이것들은 곧 고통과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화장실로 가는 입구에 계단이 있거나 폭이 너무 좁으면 휠체어 이용자가 진입하는 게 불가능하듯이, 트랜스젠더에게 있어서 성별 이분법 화장실은 접근성의 문제다.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로 통용되는 외양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면 남자/여자 화장실을 진입할 때 사람들의 의심 어린 시선이나 모욕적인 언행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정 성별 화장실을 쓰는 것 또한 당사자에게는 크나큰 디스포리아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 역시 아주 괴로운 일이다.

논바이너리 역시, 표현된 성별이 성별 이분법 기준에서 모호할 경우 화장실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표현된 성별이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대로 읽히는, 소위 패싱(passing)’이 잘 되는 트랜스젠더라면 괜찮을까?

트랜스여성인 나는, 외양이나 젠더 표현도 사회적 기준으로 여성 범주에 잘 들어맞기 때문에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여자 화장실 안팎에서 수많은 여자 사람을 마주쳐왔지만 한 번도 이질적인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다. 다만 나는 목소리가 낮은 편이기에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는 한다. 일행이 있어도 웬만하면 대화를 잘 하지 않고, 전화통화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왔다고 항의받거나 신고를 당하는 일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트랜스젠더에게 성별 이분법 화장실은, 들어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들어가서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그냥 전반적으로 문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화장실이 성별 이분법적이지 않으면 된다. 화장실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말을 하면, 이 이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남자와 여자가 화장실을 같이 쓰냐’며 덜컥 반발할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화장실에 들어갈 때 성별을 구분할까? 생식기의 차이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좀 이상하다. 우리가 화장실에서 서로의 생식기를 확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볼일은 각자 해결하는데 타인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상 우리는 서로의 생식기 모양을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데, 반드시 그걸 알아내서 나눠야 한다고 학습되어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남성기를 가졌을 거라 추정되는 외양’, ‘여성기를 가졌을 거라 추정되는 외양’을 즉각적으로 구분해낼 수 있기를 바라고, 성기 모양을 추정하기 어려운 (성별 이분법에 들어가지 않는) 불분명한 외양을 가진 사람을 보면 당혹 내지 거부감, 나아가 위협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겉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성기를 알 수 없다. 단지 성별 이분법적 규범에 근거한 확률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별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음으로 인해 그 ‘낮은 확률’에 해당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성별 분리 화장실 앞에서 고통 받는다.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589명 중 241명인 40.9%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자신의 성별정체성과 다른 성별의 시설을 이용했다’고 응답했다. 이들 중 231명(39.2%)은 ‘화장실 이용을 피하기 위해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화장실 이용을 포기하거나 제지당했다는 경우도 상당 비율을 차지했다.     

실제로 어느 학원에서는 학원장이 트랜스여성 수강생의 여자화장실 이용을 제지했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권고를 받았던 사건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강력하게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는 공중화장실에서는, 트랜스젠더가 아니어도 불편함을 겪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화장실 들어갈 때 이런걸 신경써본 적이 없겠지만, 장발인 남성이나 숏컷인 여성 등 자신의 성별표현이 우리 사회의 성별이분법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다. 숏컷을 하고 소위 보이시한 스타일을 한 여성들 중에서는 남자로 오해받아 여자화장실 사용을 제지받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리하여 화장실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배설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그 공간에 안전하게 진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구성원으로서 공적인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별 분리 화장실이 아니라 성별 구분이 없는 성중립 화장실이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하다. 요즘은 성중립 화장실이라는 말보다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이라는 말을 쓴다. 성별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신체와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모두 안전하고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화장실을 뜻한다. 해외에서는 ‘all gender restroom’ 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별이분법을 넘어선 다양한 성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있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화장실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드러나면서 성중립화장실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2022년 성공회대 사례가 있는데, 국내 대학 중 최초로 성공회대에 모두의 화장실이 설치된 바 있다. 학내 구성원들뿐 아니라 학교 밖 반대세력의 숱한 반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대 활동가분들이 치열하게 투쟁하여 얻어낸 성과이다.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인권의 진보’라고 보도하였다. 화장실이라는게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통념과 최전선에서 부딪치는 현장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좌)성공회대에 있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여전히 강렬한 반발에 시달리고 있지만 꿋꿋이 지켜내고 있다. (우) 내가 대관했던 장소 화장실에 임시적 방편으로 붙여놓았던 종이.


인권적인 이유로 성중립화장실이 필요한 것인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바로 여성들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이유다.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이 여자공간에 침입하여 범죄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성중립화장실 혹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남녀 공용’ 화장실의 개념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며, 발생할 수 있는 범죄나 위험에 대한건 별개로 고민해야 되는 문제이지 화장실 자체를 반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친다면 기존의 여자화장실에서도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으니 여자화장실을 폐지해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주장하면 말이 안된다고 할거면서, 같은 논리로 성중립 화장실을 반대한다면 그저 자신이 차별주의자라는걸 인정하는 꼴밖에 안된다. 인권이라는건 뺏고 뺏기는 파이싸움이 아니며, 안전이라는건 특정 집단을 분리시키고 보호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고 재구성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해야 안전할 수 있고, 모두가 안전해야 평등할 수 있다.         


어느 공간이던 성별분리 화장실을 사용해야 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무리 내가 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이고 여자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는 외양을 갖춘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진짜’ 여성임을 의심받지 않기위해 해야되는 노력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앞에서 서성여야 하는 수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이 땅에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비-트랜스젠더 분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

성공회대처럼 당장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수는 없더라도 대안은 마련할 수 있다. 성별분리 화장실의 픽토그램 위에 성중립 팻말을 붙여서 임시적으로나마 성중립적으로 화장실을 운영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떤 건물이나 공간에 대한 권한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의식해주고 신경써주시길 당부드린다. 남성만 있다고 여겨지는 공간에서 여자화장실이 없었고, 비장애인만 있다고 여겨지는 공간에서 장애인화장실이 없었듯이, 시스젠더들만 있다고 여겨왔기에 아직 부족한 것 뿐이다. 화장실 사용에 있어서 누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고려하여, 우리 사회가 조금씩 더 트랜스젠더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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