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묻는다. ‘여자’란 무엇이냐고. 여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길래 당신을 여자라 여기는 것이냐고. 성별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지 ‘느낌’이 아니라고 말이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트랜스젠더들도 다 그럴텐데, 남자로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벼락맞은 듯 번쩍하며 “나 여자로 살래!”가 되는게 아니다. 또한 여자라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해서 갑자기 내 모든걸 여자로 바꿔주는 스위치를 갖게되는 것도 아니다.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하기까지 지난한 내적인 번민이 있고, 정체화 이후에도 평범한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또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그 모든걸 끝낸 뒤에도 많은 경우에는 여전히 ‘트랜스젠더’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
“그냥 치마입는 남자하면 되지않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화장과 치마를 좋아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여기는건 성차별적인 사고 아니냐고 말이다. 이건 위에서 언급한 ‘성별은 느낌이 아니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치마를 입고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생 전체를 뒤흔들만한 – 다른 성별로 살겠다는 – 결정을 그렇게 손쉽게 내릴까? 일상은 남자로 살지만 취미로 ‘여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삶이지 취미가 아니므로 경우가 다르다.
단순히 '느낌'도 아니고 '편견'도 아니지만 설명할 언어가 없다.
그런 비난은 성별표현과 성별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치마를 입는 것은 성별표현이고, 트랜스여성은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여성’ 이라고 하는 추상적 관념이 ‘치마입은 외양’이라고 하는 가시적인 표현으로 드러난 것이다. 왜 치마를 입냐고? 치마를 입어야 여성으로 보여지니까. 내가 여성임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은 제한적이니까. 당장 공중화장실 픽토그램만 봐도 여자화장실 그림은 치마를 입고 있다. 그러니 트랜스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은 사회에서 규정되어 있는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대어서 자신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좀 더 성평등한 사회가 되어서 여성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게 된다면, 트랜스여성의 삶도 훨씬 다채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서 여성이 뭐냐고 물으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여성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는걸 설명하려고 하니 느낌에 의존하게 된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들을 주욱 나열해놓고 보니, 그것들을 사회에서는 ‘여성’ 혹은 ‘여성적’이라는 범주에 넣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을 뿐이다. 도무지 ‘남성’이라는 이름과는 들어맞지 않고 계속하여 어긋나는 것들. 내가 여자이지 못해서 비참함을 느꼈던 적이 많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내가 정체화를 했을 무렵, 폴댄스를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적이 있다. 긴머리를 찰랑거리며 봉을 타는 여성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댄스 학원을 알아보고 문의를 해봤더니 ‘여성 전용’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여성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남성은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남녀공용인 곳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어느 공간이던 여성 입장에선 남성이 없는게 안전할 확률이 높고, 특히나 신체가 드러나는 복장을 한 채로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여성이어도 ‘여성 전용’ 공간을 더 선호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바로 그 지점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나는 왜 여성이 아닌걸까. 나는 왜 남성으로 분류되어, 여성을 성적으로 욕망하거나 여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상정되어야 하는걸까. 그 시기는 내가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여성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했던 시기어서 비참함이 더욱 극심했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갖추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남자’라는 내 지정성별로 자꾸 가로막히는게 고통스러웠다.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고 털이 없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몸을 갖고 싶은 욕망, 그 몸을 가진채 여리여리하고 부드럽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살고싶다는 욕망. 그 외 차마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욕망들을 주욱 나열해놓으면, 사회에서는 그것을 ‘여성’ 혹은 ‘여성적’인 것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폴댄스 하나조차도 내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게 너무 비참했다. 이 일을 계기로 호르몬 치료를 받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또 하나의 일은 친구관계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성친구 A와 여성친구 B를 포함한 친구 그룹이 있었다. A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가 없는, 흔치않은 남성이었고, 나는 종종 그와 게임을 하며 놀았다. A는 나에게 다정했으며,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크게 도움을 준 적도 있었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한편 B는 예쁘장한 외모에 상냥한 성격을 가진 친구로서 어디를 가든 인기가 많았다. A는 나를 통해 B를 알게 되었고, 알게된 지 얼마 안되어서 나에게 B를 좋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물론 B는 내가 보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성이었지만, A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를줄 알았다. 알게된 지도 얼마 안됐고 대화도 얼마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외모만 보고서 그렇게 홀랑(?) 좋아해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사람을 외모만 보고 좋아할 수 있고 그게 잘못되었다는건 아니다. 단지 내가 비참했을 뿐이다. 분명히 나랑 더 오랜 시간을 보냈고 나랑 더 공통 관심사가 많은데, 내가 아니라 B라니. 내가 여성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A가 아무리 나를 존중한다지만 A가 보기에 나는 예쁘지도 않고 충분히 여성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에 말로 다 할 수 없이 너무나도 비참해졌다. A가 B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쩔쩔매는걸 볼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나도 남자들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해주기를 바랐고, 남자들이 나에 대해 성적인 긴장감을 느끼길 바랐다. 나를 ‘인간’으로서는 존중할지 몰라도 결코 ‘여자’로서는 대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때마다 비참함을 느꼈다.
당시에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 A와 B 모두를 힘들게 해서(그건 내가 잘못한게 맞다) 관계는 깨지게 되었지만 그 일은 여전히 나에게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 후로 종종 어플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곤 했다. 일반적인 남자들은 트랜스젠더라면 질색을 하지만, 트랜스젠더를 성적으로 좋아하는 ‘러버’(35장 참조)들은 나를 적극적으로 욕망하곤 했다. 나는 러버들을 만나며 여자로 대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해소했다. ‘욕망의 대상이 되고싶은 욕망’인 것이다.
‘여자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욕망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여자로 살고싶다’로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이제는 내 글이 제법 쌓였다. 내가 이만큼이나 설명했으니 이쯤되면 사람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