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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Sep 08.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67장: LGB'T'를 거부한다

불편한 진실

[67장: LGB'T'를 거부한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내가 본격적으로 성소수자운동에 뛰어든지는 정말 얼마되지 않았지만,  운동을 해오면서 언제부턴가 미묘한 찝찝함이 있어왔다. 그 감각을 오랜 시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조금씩 언어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자에겐 언어가 중요한 거니까.

나의 찝찝함과 불편함은 바로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단어인 ‘LGBT’에서부터 시작됐다. LGB(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는 성적 지향을, T(트랜스젠더)는 성별정체성을 나타내는데 그러면 LGB와 T는 서로 아예 다른 범주 아닌가? 어떻게 ‘LGBT’라는 말로 같이 묶을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폭넓게 봤을 때 L,G.B.T 모두가 성(性)이라는 영역에서 차별받는 소수자이니 그렇게 묶(이)게 된 배경은 이해된다. 하지만 ‘다같은 성소수자니까 다같이 뭉치자!’ 라고만 해버리면 그 안에서 LGB는 겪지 않는데 T만이 겪는 억압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성소수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게이,레즈는 숨길 수 있는데 트젠은 숨길 수 없으니까 더 힘들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이 말은 단연코 사실이다. 성적 지향의 경우는 직접적으로 연애장면을 들키지 않는 이상, 굳이 말하지 않으면 어찌어찌 숨길 수는 있다. 그러나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외모 및 의복의 변화, 호르몬 치료나 수술 등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그래서 ‘커밍아웃’이라는 말도 트랜스젠더에겐 딱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한테 언제 어떻게 밝힐건지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위 말해 ‘티’가 나버리기 때문에 당연히 T가 겪는 억압이 LGB보다 훨씬 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억압을 겪는 층위가 다르다. 성적 지향으로 겪는 억압은 주로 연애나 결혼 영역인 반면, 성별정체성으로 겪는 억압은 일상의 거의 모든 영역이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을 정체화한 이후부터는 매 순간이 투쟁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학교,회사,병원,은행,관공서,호텔,화장실 등 가는 곳마다 온 세상이 남자와 여자로, 성별이분법으로 나눠져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성별 호칭이나 성별 집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집요하게 성별 추궁을 받거나 의심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문구가 있어야될 정도로 T가 놓인 상황이 열악하다.


내가 이런 간극을 느낀 구체적 장면들이 있다. 어떤 성소수자 모임을 간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나만 트랜스여성이고 나머지는 다 게이였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한테 “목소리 듣고 남자분인줄 알았는데 여자분이신거군요” 라는 말을 한다던가, 연애 얘기가 나왔을 때는 “연애할 때는 임신을 못하니까 트랜스젠더인걸 숨기면 안 되지 않느냐” 라는 말을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매우 무례하고 차별적인 발언을 일삼았다. 분명히 ‘성소수자’ 모임이었는데 ‘성소수자’인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뭔가 부당하고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는 ‘성소수자라서 좋은 점’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다들 입을 모아 “(이성애)결혼 제도 부합하지 못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니 그만큼 돈을 아낄 수 있다” 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돈을 아낄 수 있다’니.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트랜지션 하느라 들인 돈이 얼마인데. 그 날 일을 계기로 이 ‘성소수자’ 혹은 ‘LGBT’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더욱 몰두하게 되었던 것 같다.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분명히 권력 차이가 있고 억압받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 떠오르는 장면은 뉴스기사를 보았을 때다. 명절에 성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다룬 기사였다. 어떤 동성애자 A씨는 친척들을 만나서 연애 여부를 물어볼 때, 자신의 애인을 당당히 소개할 수 없음을 토로했다. 물론 차별적인 분위기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맞고 누구든 이런 일을 안 겪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의 상황이랑 비교했을 때는 이 역시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고모로부터 ‘여장 프사’로 인해 “애가 어디 잘못된거 아니냐”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27장 참조) 친척들과의 연을 끊었으며, 외형이 너무 많이 바뀌어 버린 내 모습을 보고 친척들이 무슨 말을 할 지가 두려운 나머지 할머니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다. 고작 프로필 사진 가지고도 그 난리였는데 실제로 모든 수술을 마친 나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걸 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자?손녀?의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은 나에게 꽤나 큰 비통함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나에게 명절과 친척 하면 떠오르는게 이런 사건인데, 친척들과 지내며 애인 얘기를 하는게 어렵다는 성소수자와는 너무나 놓인 위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LGB와 T는 다르다”는 얘기를 하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며, T만이 겪는 고유한 억압을 드러내지 못하면 트랜스젠더의 인권은 계속 암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말은 나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오고 있고, 심지어 반대 진영(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진영)에서도 하는 이야기다. 다음 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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