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역? 초월번역? 통역사의 제2의 덕목
"이보다 더 완벽한 통역이 있겠지."
찰나의 순간에 누군가의 말을 러시아어로 통역할 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다.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 말을 전달한다는 것은, 나의 외국어 실력과는 별개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보다 더 경력을 많이 쌓은, 그러니까 저기 '푸쉬킨 하우스'나 '에듀윌'에서 활동하시는 우수한 통역가분들의 화려한 이력을 볼 때에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아무리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도, 경험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난 결코 내 통역이 가장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통역가들이, 특히 대체로 고용주가 못 알아듣는 제2외국어를 통역하는 이들은 적당히 상황을 살피며 의역을 꽤 자주 한다. 그런데 이를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게, 때로는 1대 1, 혹은 '단어 by 단어'로 직역하는 것보단 현지어의 뉘앙스와 문화를 일정 수준 반영한 의역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책임소재 문제로 예민한 우리나라 관공서 특성상 의역보단 정확성이 뛰어난 통역을 선호하긴 하지만, 수년 전 '기생충'으로 대히트를 친 봉준호 감독의 통역사분의 의역이 '초월 번역' 등의 찬사를 받으며 분위기가 어느 정도 반전되는 추세로 보인다.
나의 의뢰인이 매번 봉준호 감독처럼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고 커뮤니케이션에 유능한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어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유능했다면 대한민국에 '기생충'같은 명작이 매일 개봉했겠지. 현실 속 의뢰인, 그러니까 내가 전달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은 한국어로도 횡설수설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표현하면 "에이, 한국어로 말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싶을 수 있지만, 한국어로도 명료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같은 한국인끼리도 소통 문제가 생겨서 오해하고 감정 상하는 경우를 적잖게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럴 때 가끔 의뢰인은 통역사에게 적당히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고, 이를 알아서 분위기에 맞춰서 잘 말해달라고 요청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사실 이 정도 오퍼 갖고는 제작에 들어가기가 좀 곤란해요. 왜냐면 단가가 안 맞으니까. 얘네도 아마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주문하기는 리스크가 있어서 쉽지 않을 텐데, 아무튼 통역사님이 적당히 잘 말해주세요, 아시겠죠?"
이럴 때에 통역사는 통역을 넘어 일종의 해외영업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 해외 거래처에서는 또 대뜸 한국업체 대표가 아닌 나에게 눈을 맞추며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당신도 러시아에 있어봐서 알잖아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신뢰를 쌓고, 관계가 돈독해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거라고."
'러시아에 있어봐야 알' 이 말은, 결코 내 의뢰인에게 한 말은 아니다. 그럼 나는 러시아 업체 대표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정도 그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주고, 한국업체 대표에게 이 말을 전달해준다. 정확히는 나한테 한 말을 전달해주는 셈이 된다.
A :통역→ B
A ←통역:B
본래 통역 프로세스는 위와 같이 도식화할 수 있겠으나, 이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기형적인 모습이 된다:
A →통역
통역→ B
통역← B
통역→A
통역사가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그러니까 대화의 주체가 되면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나의 역할에 있어서 적정선을 유지하지만, 사실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선에서 어느 정도의 개입은 불가피할 때가 있다. 오히려 의뢰처에서 이를 원할 때도 적지 않다. 물론 통역사와의 상당한 신뢰가 쌓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역할을 맡기더라도, 우리 회사에게 절대 해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에 통역사에게 더 많은 속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느 정도 의지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특히 의뢰처가 맨 땅에 헤딩하듯이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자인 경우에 더 잦다.
다시 말해, '정확한 통역'만이 통역사의 유일한 미덕은 아니다. 특히 소통은 감성적 소구의 비중도 매우 크기 때문에, 좋은 인상 심어주기나 영업력 등의 능력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아직 구글 번역기가 '요소수 부족'을 'недостаточное количество элементов'라고 오역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지만, 이보다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통역사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