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축제를 다녀와서
이상기후로 가을 폭우가 예보된 주말, 어제는 정말 큰 비를 몰고 오려는 듯 아파트 뒤쪽 숲속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느새 바람이 을씨년스럽고 가을이 성큼 깊어진 느낌이었다. 오늘은 어제 바람이 세게 불어서인지 창밖으로 맑고 환한 햇살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날씨를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우리 부부는 지난번 가보자던 국화축제에 가보기로 했다.
차로 사십 분 정도 달려 축제 행사장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걸어가는데 안내표지판이 잘 눈에 띄지 않아 지도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무작정 따라갔다. 곧이어 행사장을 가리키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입구부터 왠지 썰렁했다. 대문에는 커다란 초록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 어두운 보라색으로 축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눈을 씻고 봐도 글씨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국화가 만발한 축제장을 상상하다가 입구부터 약간 실망스러웠다. 우리는 글씨를 왜 저런 색으로 조합했는지 모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행사장 안에는 좁다란 길을 따라 초록 화단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었다. 가까이 보니 점점이 작은 꽃망울을 감싸고 있는 잎사귀들만 사방에 무성했다. 조금 더 안으로 가니 중앙 무대에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근처에 특산품 판매장과 체험 코너가 있었다. 우리는 한바퀴 둘러보며 입장티켓에 딸린 쿠폰으로 떡을 몇 개 사고 국화 분재 전시 작품들을 구경했다. 전체적으로 꽃이 별로 없어 대충 둘러보고 서둘러 나왔다. 입구 밖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돌아보니 인도 옆 초록 화단에도 역시나 짙은 파란색 글씨가 세워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 축제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훑어봤다. 국화는 아직 피지 않았지만, 곳곳에 핑크뮬리가 있어 그런대로 예뻤다. 그 순간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아! 꽃이 안 피어서 그랬구나! 대문에 축제 명을 알리는 글씨가 왜 어두운 보라색이었는지, 인도 옆 초록 화단 글씨가 왜 짙은 파란색이었는지 그제야 이해됐다. 노랗게 꽃이 만발했으면 진한 보라색과 파란색 글씨는 너무도 눈에 잘 띄었을 것이다. 축제장을 둘러보는 내내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지나치며 조금만 달리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내가 흘려보내는 작은 것들이 나의 일상을 채운다. 조금씩 다르게 보면 내 시선도 깊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시간은 밀도를 더해갈 것이다.
축제 글씨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