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함vs자유
어렸을 때 부모님이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날개”라고 대답하곤 했다. 언제나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으셨던 외할머니께서는 나의 천진한 꿈을 깨주는 대신, 호산장이 서는 날에 가서 언제고 날개를 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철썩같이 믿은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도대체 언제 장이 서느냐며, 안달복달 닥달을 해댔던 기억이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개 같은 것은 파는 곳도 없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지만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열망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채로 내 안에 있는 듯하다. 나이 사십이 된 지금까지 열망의 대상은 다양하게 변화해오긴 했지만, 자유로움이란 가치는 그 선택에 늘 함께했었다.
예를들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원하거나 너무 분수에 넘치는 가격이라 분실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면 나는 그런 물건은 소유하고 싶지 않다. 너무 소중한 물건 같은 것은 최대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면에서 아이가 태어나며 내 마음의 평화는 끝장났다) 태어난 곳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성년이후 어디에 살지, 어디서 죽을지는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죽는 것이 나쁘단 의미가 아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 복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이었다는 전제하에. 단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까 이렇게 계속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거주 국가를 자주 바꾸게 되어 아직도 안정된 거주지가 없이 살고 있다.
어른이 되면 더 자유로울 것이라 믿었지만, 세상에 눈을 뜰 수록 난 얼마나 내가 자유롭지 않은가를 깨닫는다. 비단 경제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자유를 성취하는 것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세뇌된 방식대로 사고하며 그것이 누군가가 주입해 놓은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는 그 소유 유무가 명백하다. 경제적 자유가 없는 사람은 본인 스스로 그것을 자각하게 마련이다. 자각한다면 그 후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 쟁취하려고 노력하든가, 적당히 타협하며 안주하던가.
그러나 비물질적 자유는 그렇지 않다. 어려서 말뚝에 묶여 산 코끼리가 제 몸집이 그 말뚝을 뽑아버릴 정도로 크고서도 그 말뚝에 묶여사는 것처럼 누군가 어느 시점에 박아둔 말뚝에 우리는 묶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에겐 얼마나 많은 말뚝이 있을까.
사람들은 대개 경제 선진국에 살 수록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산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선진국일 수록 정부의 간섭과 온갖 규제가 있기 마련이며 개인의 자유는 그 허가 속에서만 존재한다. 여러 사회복지를 핑계로 뜯어가는 각종 세금은 물론 국가가 공공의 안전을 내세울 때 한 인간의 자유는 하루아침에 빼앗아 갈 수 있는 초라한 무엇이 된다.
미디어가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 때 그 혜택을 받는 것은 우리인가 그 메세지를 받아들길 원하는 그 누군가인가. 스마트 폰과 유투브로 정보의 개방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에 엄청난 쓰레기 정보들을 소화하는 우리들의 정신적, 영적 부표는 어디로 떠밀려 가고 있는가. 이제 대대분의 사람들에게 하루의 작은 쉼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정신은 끊임없이 소비되어야 한다. 단지 소모하는 인간으로 전락한 지금 영혼의 자유는 그 어디도 올릴 자리가 없다.
이제 앞으로 AI의 시대가 오면 더이상 그나마 존재하던 인간의 지성이 필요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무엇이던 AI앞에서 오래된 주판처럼 여겨질 것이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잉여인간으로 살아가며 주어진 것들을 소비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아주 소수의 자유인과 대다수의 통제가능한 사람들로 나뉘게 되지 않을까. 편리함은 너무도 달콤해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거래에 합의하며 자신의 자유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너무도 쉽게.
몇년 전 모두가 경험했듯 자유를 지키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