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감정이 극대화되었을 때보다 오히려 담담해서 더 슬플 때가 있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마치 남에게서 들은 것인 양 덤덤하게 말할 때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50/50은 20대 젊은 암 환자의 삶에 대해 다룬 이야기다. 앞선 리뷰에서 다룬 꺼져버려 종양군과도 다르다. 일단 남녀가 바뀐 모양새다. 물론 주인공들의 성격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백백하가 맡은 슌둥은 대책 없이 밝은 무한 긍정의 소유자인 반면, 조셉 고든 래빗이 맡은 아담은 그보다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지녔다.
주인공 아담은 27살의 나이에 청천벽력 같은 척추암 진단을 받는다. 불행은 항상 겹쳐온다고 누가 말했듯 그때까지 사귀던 여자 친구는 바람이 났고, 답 없는 초긍정 절친 카일은 이번 기회에 새로운 여자를 사귀라며 되지도 않는 바람을 잡는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을 도와주는 초보 심리 상담사 캐서린과는 또 묘한 기류를 풍긴다.
이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분노)의 5단계가 극 중에 자연스럽게 보인다. 1단계 부정. 그럴 리가 없다며 검사 결과를 믿지 않고 그러다 2단계 분노로 넘어가 왜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자신이 암에 걸렸는지 화를 내다가, 3단계 타협의 과정으로 넘어가 암이란 것을 직시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동원하여 항암치료를 받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4단계인 우울한 증세를 겪고 이내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마지막 수용의 단계까지 일련의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무섭지만 무섭지 않게, 그저 담담하게. 무엇보다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그의 친구 카일(세스 로건)이다. 카일은 늘어지고 자칫 어두워질 수 있는 내용의 영화에 감칠맛 나는 조미료가 되어준다. 아담이 낙담하지 않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시답잖은 개그로 웃겨주기도 하는 그는 사실 그 누구보다도 슬프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친구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오로지 친구만을 위한다.
남들이 보기에 모자라고 바보 같지만 그 한없는 긍정의 바다에 퐁당 몸을 내맡기고 싶을 정도로 극을 유쾌하게 이끌어 나간다. 진지함과 웃음 사이를 적절하게 조절해가며 줄타기하는 카일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에 저런 친구가 있다면 참 성공한 인생이겠거니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든다.
흔히 암이라는 소재의 것들을 보면 연민과 신파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그런 식상한 것들은 클리셰(Cliche)라고 부른다. 정형화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창작물들은 어느 정도의 클리셰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창조된 이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듯이. 그러나 수작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데에는 같은 클리셰라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에 있다.
50/50은 암이라는 소재를 다루었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었다. 암환자라고 하루하루가 슬프고 우울하지는 않다. 그들도 엄연히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고 단지 조금 아플 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그들도 살아간다. 암이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암은 당연히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을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보여줄 뿐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이 영화보다 담백하게 다룬 영화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호들갑 떨지 않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 영화,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나 보다.
p.s. 이 영화는 실제 영화의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작가의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