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 Mistyblue.

단편소설

by Erebus


비가 막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공간을 자욱하게 메웠다. 이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들이 수북했다. 어림 잡아도 담배 한 갑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남자의 입에서는 연신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수심이 가득했다.


한 여자가 커피를 마신다. 앉은자리에서만 연속으로 두 잔을 마시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여자는 커피를 마실 때 살짝 입을 여는 정도 말고는 내내 무표정했다. 그녀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가 자리에 앉아 연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했고, 이윽고 비가 내렸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선글라스를 벗어 탁자에 놓았다.


마지막 한 개비가 남았을 때 누군가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좀 많이 피시네요?"

제법 반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남자는 그의 얼굴을 보더니 피씩 웃음을 터트렸다.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막 마지막 개비에 불을 붙이려던 남자는 주춤하고 라이터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미안하군, 나도 이렇게까지 태웠을 줄은 몰랐네. 아무것도 안 시켜서 미안하네. 일단 차가운 보드카 한 잔 주겠나."

청년은 곧 보드카 한 잔을 가져왔다. 남자는 단숨에 보드카를 벌컥 들이켰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얼굴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이곳은 번화한 거리의 골목 끝에 있는 작고 조용한 바였다. 주변의 다른 바에 비하면 그렇게 화려하지도, 손님이 많지도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소소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테이블 수는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단골들은 그 점을 좋아했다. 그는 이 곳의 단골이었다. 남자가 앉아있는 곳은 바텐더와 바로 마주 볼 수 있는 카운터 자리였다. 단골손님이 아니면 쉽게 앉을 수 없는 자리다. 술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주류를 정리하는 청년은 이 바의 주인이었다. 파마를 한 듯한 곱슬머리를 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에 성격도 다정다감해서 바의 손님들 모두 그를 좋아했다.


"시간이 된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나?"

"원래 바의 카운터 자리는 그런 공간이지요.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문을 닫아야겠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청년은 바의 문으로 가서 open이라 쓰여 있는 푯말을 closed로 바꾸고 문을 닫았다.

"원래는 안 되지만 뒤로 나가는 문이 있으니 저와 함께 나가시면 됩니다. 단골이라 봐 드리는 거예요"

청년은 남자가 마주 보는 편에 앉았고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그녀를 만났다네.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였어. 우연히 길 가다가 말일세."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사랑이었다네. 헤어지고 나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표정이 좋지 않더군. 마음이 좋지 않았어. 20년 만이었네." 남자의 표정은 아련했다.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와 헤어지고 나서 결혼했는데 몇 년 전에 이혼했다더군. 알고 보니 남편이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다나 봐. 그런 사람이랑은 못 살지. 슬하에 딸린 자식은 없었고, 그저 혼자서 조용하게 지낸다고 하더군."

"안타까운 일이야. 안타까워.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싶네."

청년은 남자가 몇 년 전에 부인과 사별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찾아와서 와인을 한 잔씩 마시곤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 되었다. 사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방황하는 것처럼 매일 밤마다 찾아오기도 했었다. 상황이 나아진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오지만.


"돌아가신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시게 된 건가요?"

"첫사랑과 헤어지고 1년 뒤에 같은 직장의 동기와 연애하고 결혼했네. 결혼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 큰 어려움 없이 평탄하게 흘렀지. 부인이 몸이 약해 아이가 없었던 것 빼고는."


"시험관 아기도 여러 번 시도해보고, 별의별 것을 다 해 봤지만 안 되더군.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 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 TV에 아이가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리고 그랬네. 알게 모르게 신경 쓰긴 했던 거야. 요즘은 일부러 낳지 않는 부부들도 있다지." 남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부부들은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려고 하는 부부들도 많거든요."

"그렇다고들 하더군. 그럴 거면 결혼을 왜 하는지 말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 자네는 어떤가?"

"우선 인연이 있어야겠지요. 지금은 혼자라서요. 자식이 없길 바라진 않습니다. 두 명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청년은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면도한 턱을 만지는 것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마지막 개비인지라 자네 몫은 없군."

"전 술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직업도 바텐더고요."

"그런가. 그나저나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자네 이야기를 듣고 싶군. 자네는 왜 바텐더가 되었나?"


마지막 개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침내 남자는 마지막 개비를 태웠다. 청년은 많은 술들 중에서 테킬라를 찾아들더니 스트레이트 잔에 부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들이마셨다.


"원래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지만, 먼저 이야기를 해 주셨으니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저는..."




"손님, 주문하신 디저트 나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카페 직원이 여자 앞에 디저트를 가져다 놓았다. 케이크였다. 여자는 막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자를 만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곧 헤어졌다. 우연이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 만남이었다. 새삼 참 딛고 있는 땅이 좁음을 느꼈다. 그 시간 그 장소에 첫사랑이 길을 걷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 중에 한 명인 줄 알았다.


그가 이름을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그는 과거에 스쳐 지나간 남자 중 한 명이었다. 한때는 열렬하게 사랑했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거리 중 하나였다. 만나서 특별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나 나누었을 뿐이다. 새삼 이 나이에 크게 말할 것도 없었다. 알게 된 것은 서로의 근황 정도. 둘 다 본의 아니게 혼자 산다는 것. 이혼하거나 사별하거나, 주변에서 없는 이야기는 아니고 요즘은 크게 흠이 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여자는 케이크 한 면을 포크로 푹 – 찔렀다. 케이크는 크림과 함께 곧 흐트러졌다.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케이크는 자신이 속해있던 세계에서 떨어져 나갔다. 여자는 잘려 나간 케이크를 계속 응시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계도 케이크와 같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 본다. 아니, 우습지 않다. 어쩌면 사람이란 존재는 완전하게 태어났다가 조금씩 조각조각 나눠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나뉜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일부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와 함께 떨어져 나간다. 어떤 이와의 관계라는 것은 떨어져 나간 케이크 조각 같은 것이다. 케이크를 먹으려면 한 부분을 온전한 케이크에서 떼어내야 하듯이 나와 관계를 맺기 위해 나에 대한 한 가지를 떼어 다른 이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케이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떼어낸 부분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디저트 케이크 한 조각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잘 살고 있다면 모를까 두 사람 다 그렇다고 볼 순 없었다. 여자는 떨어져 나온 케이크를 살포시 들어 입에 넣었다. 케이크란 존재는 그렇게 입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것을 꿀꺽 삼키며 여자는 첫사랑에 대한 것도 함께 삼켰다. 이제는 식어 얼마 남지 않은 미지근한 커피 한 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특별한 계기가 있진 않았어요.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 하나로 한계치까지 제 자신을 시험해가며 술을 먹는 것이 일상이었죠. 그러다 하루는 한 선배가 오늘은 비싼 술 마셔보자며 데려간 곳이 학교 앞에서 제법 크게 장사했던 바였고, 그때 처음 칵테일을 접했어요. 다른 술집과는 분위기부터 달랐죠. 혼자 술 마시기도 좋았고요. 가게 안의 조명의 반짝거림이 좋았어요. 칵테일은 이름도 예쁘고, 맛도 맥주나 소주와는 달랐죠."

"바의 장점이지. 내가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고." 남자는 맞장구를 쳤다.

"첫 학기를 다니면서 알바 겸 해서 그 바에서 일하기도 했고. 첫사랑도 그곳에 왔던 손님이었어요. 이래저래 바와는 뗄 수 없는 사이였죠."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었는데 문 앞의 벨이 울렸어요. 당연히 손님이 왔겠지 하고 쳐다봤는데 정말 제 이상형과 똑같은 여자가 일행과 함께 나타난 거예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문도 어리바리했죠.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네요." 청년은 실소를 터트렸다.


"서비스를 줘도 그쪽에 더 주고. 주인아저씨께 혼나기까지 하면서요. 하하. 그렇게 첫 만남을 뒤로하고, 며칠 뒤에 그녀가 또 찾아왔어요. 이번에는 혼자더군요. 술을 좀 마시더니 갑자기 펑펑 울더라고요. 사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헤어졌다고요. 알고 보니 저번에 왔던 일행 중에 남자 친구가 있던 모양이었어요. 울던 그녀를 달래며 핑크 레이디를 한 잔 만들어줬어요. 색깔이 예쁘다며 좋아했죠. 그녀와는 그렇게 친해졌고 군대에 있을 때도 잘 사귀었어요. 군대 갔다 와서는 으레 많은 커플들처럼 이유도 모르게 헤어졌고요.".

"젊은 시절엔 다 그런 걸세. 흔한 거지."


"전역 후 다시 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한동안은 일이 손에 안 잡혔어요. 아무 이유 없이 3일이나 바 아르바이트를 안 하기도 하고, 대학 생활에도 지장이 있었죠."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역시 첫사랑은 남자에게 그런 건가 봐요. 그 뒤 몇 번인가 다른 여자들도 만났지만, 길게 만나진 못했어요."

"인연이란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는 법이라네.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그래. 잡아야 하는 인연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것이라네. 자네에게도 그런 순간이 올 테지."


바텐더는 원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주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것도 크게 관여하기보다 그냥 듣기만 하는 편이다. 바텐더는 단순히 술을 파는 사람이라기보다 바에 오는 손님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에는 혼자 오든, 같이 오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아니면 마음속에 풀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응어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바에 왔던 단골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나 하고 깨닫기도 했다. 청년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야기만 나눴을 뿐인데, 밤 12시가 넘어갔다. 청년은 남자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칵테일을 주었다. "페어웰의 의미로, 딱 한 잔만 더 하고 들어가시죠. 도수는 센 편이지만 마지막으론 딱이죠."


남자와 청년은 건배를 한 뒤 마셨다. 남자는 뻗었고, 조금 버틸 힘이 남아있던 청년이 남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낸 뒤, 청년은 다시 돌아와 가게를 마무리했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남자가 남기고 간 타다 남은 마지막 담배 한 개비가 수북이 쌓인 담배 더미 위에서 찌그러진 채로 조용히 마지막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청년의 바가 문을 여는 시간은 오후 7시다. 저녁을 먹은 후 가장 적당한 시간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30분쯤 매장을 열 준비를 마치고 7시 정각에 맞춰 딱 문을 연다. 보통은 7시가 되자마자 손님이 오진 않지만 그 날은 달랐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중년의 여인이 바의 문을 열었다.

"위스키 한 잔 될까요?"

테이블에 앉은 여인에게 코스터(coaster)를 내놓았다.

"물론, 안 될 리가 없지요."

여인은 한 모금 마시더니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바에는 처음이신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술을 마시긴 하지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오늘은 위스키가 마시고 싶군요."

"천천히 마시다 가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신경 쓰지 말고 일 봐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번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들어왔다.

"블랙 러시안 하나랑 깔루아 밀크 한 잔이요."

'커피를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커플인가 보군.' 블랙 러시안은 보드카에 커피 리큐르인 깔루아를 넣어 만드는 칵테일이고, 깔루아 밀크는 깔루아와 우유를 적당량 넣어 만든 쉽게 말하면, 커피 우유와 같은 것이다.


여자는 바가 처음인지 많은 조명과 술장에 있는 술과 리큐르 등에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남자에게 재잘거리고 있었고, 남자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열심히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조금은 흥미 있게 지켜보다가 좀 전의 중년 여인의 부름에 옆을 돌아본다.

"덕분에 잘 마셨군요. 종종 들르게 될 것 같아요.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요. 조금 더 일찍 찾아올 걸 그랬군요."

청년은 짐짓 웃으며 얼마든지 와도 좋다는 대답과 함께 계산을 했다. 그녀가 마시고 간 자리에는 온 더 락 잔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고, 대신 얼음이 조금 녹아 밑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흘러가는 물과 같은 곳. 청년의 바는 흐르는 물들이 잠시 쉬어가는 작은 돌과 같은 곳이었다. 물은 돌에 걸려서 잠시 흩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흘러간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청년은 그 흐르는 물들이 좋았다. 그 돌이 좋다면 그들은 단골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흘러가지만 개중에는 흐르지 않고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어쩐지 저 중년의 여인도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커플들은 무엇이 좋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청년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으려 칵테일 잔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닦고 있었다. 바에 흐르는 음악의 볼륨을 조금 더 높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용한 피아노곡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열린 귀를 막을 순 없었다. 대부분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지만, 커플의 모습을 보는 청년의 모습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8시 30분경. 찾아오는 손님들로 테이블이 만석이 되었다. 손님의 대부분은 비즈니스 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다. 열심히 그들의 칵테일을 만들어 주다 보면 시간은 그럭저럭 빠르게 흘러간다. 어느 가게나 그렇듯이 술에 취한 진상 손님도 있기 마련이다. 한 테이블의 손님이 돈을 던지며 화가 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행과 대화 중 말싸움이 붙은 모양이었다. 청년은 서둘러 사태를 수습했지만 그 손님은 이미 화가 날 대로 나서 돈을 바닥에 내던진 채 가게를 떠났다. 청년은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여성 손님이 주문을 해왔다. 청년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제법 젊어 보이는 여인이 웃으며 아까 손님이 던지고 간 돈을 집어서 청년에게 주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진상들이 많이 늘어나는군요. 어딜 가든 술만 마시면 저러는 사람들 있네요. 여기 코냑 한 잔이요."


"오늘은 술 마시기 좋은 저녁이군요. 오후에 여는 바는 여러 군데 갔는데, 여기 진짜 좋은데요."

아까의 광경을 떠올렸는지 호탕하면서도 조금 녹진한 말투로 여인은 청년에게 말했다. 묻지 않아도 본인이 털어놓은 이야기로는 모델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인의 차림은 이곳에 있는 어떤 손님들보다 세련되고 깔끔했다.




약간 짙은 화장에 밝은 립스틱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손목에 차고 있는 조그마한 시계는 패션에는 문외한과 다름없는 청년이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뭐라고 불러야 하죠?"

"편하실 대로 부르면 됩니다. 보통 단골들은 M이라고 부르죠."

"좋네요. 아까 그 손님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이 곳이 마음에 들어요. 이 바의 조명도 구도도 그리고 당신의 어수룩하지만 제법 귀여운 얼굴도요." 여인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둬요. 여기 단골이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는 얼굴과 함께 당당한 걸음으로 원래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청년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지만 명함을 보았다. 명함에는 이름과 전화, 에이전시의 위치 같은 정보들이 적혀있었다.


그녀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찾아왔다. 요령이 생겼는지 문 닫기 전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찾아와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청년은 자신과는 다른 여인이 마음에 들었고, 처음부터 청년을 맘에 들어 한 여인은 급속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둘 다 주량이 세서 한잔씩 주고받다 보면 금세 폐점시간을 넘겼다. 남자의 옷맵시는 점점 나아졌고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청년의 바 단골들이었다.

"요즘 여자라도 사귀는 모양이로군. 좋은 현상이야. 자네 같은 나이에 어울리는 일이지."

"여자 친구를 소개해주면, 어떤 사람인지 한 번에 알 수 있을 텐데."


그럴 때마다 청년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모든 상황을 넘어가곤 했다. 폐점시간이 지나 불을 다 꺼놓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함께여서 좋은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 일하는 에이전시에서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 볼래? 칵테일 만들어주면 더 좋고. 파티에는 역시 칵테일이지."

"상관은 없는데 괜찮겠어?"

"why not? 문제없잖아? 칵테일인데!"


그녀에게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파티 당일, 그렇게 큰 규모의 파티 장은 청년은 난생처음 보았다. TV에서나 보던 유명 연예인, 모델들, 패션 잡지사 사장 등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고 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매사에 쾌활하고 긍정적인 청년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손짓에 청년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청년 앞에서 그녀가 싱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장의 셀 수 없을 사람만큼의 칵테일들이 동시에 빠져나갔다. 파티 장에 모인 바텐더들 중에는 얼굴을 아는 몇몇 선배 바텐더들도 있었다. 그들은 힘을 모아 다양한 칵테일을 만들어냈다.


모히또, 코즈모폴리턴, b52, 마티니와 같은 유명한 칵테일부터 여성들을 위한 무알코올 칵테일인 신데렐라, 스크루 드라이버, 블루하와이 등, 청년은 아마 자신이 만들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칵테일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연인은 그가 열심히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주변의 인물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특유의 제스처로 대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스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가장 화려한 음료인 레인보우 칵테일을 연거푸 여러 잔 만들자 그 속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선배 바텐더의 질투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태연한 척 칵테일을 만들 뿐이었다. 파티는 무사히 끝나고 그는 몇 장의 명함들을 받았다. 그들은 차를 타고 근처에서 드라이브를 즐겼다.


밤바람은 아직 쌀쌀했지만 알 수 없는 쾌감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둘 뿐이었지만 동시에 하나였다. 그 날의 밤은 길고도 짧았다.



바텐더의 하루는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저녁 시간대에 일하는 바텐더들은 낮에는 보통 잠을 잔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낮과 밤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예전의 이야기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분명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부족한 잠을 쪼개서라도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마다 집으로 찾아왔다. 냉장고에 부족한 재료가 있는지 확인하고 채워놓곤 했다. 그러고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언제나 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씻는 사이에 사이에 살짝 구워 겉이 노릇노릇한 식빵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달걀프라이, 얇게 썬 베이컨에 반듯하게 잘라 놓은 토마토. 외국에서 모델 생활을 오래 했다는 그녀는 외국식 아침식사를 능숙하게 재현했다. 식탁은 어느새 외국 호텔의 조식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아침이 차려졌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으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그녀와 만나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하루의 시작이 원래 이랬던가.'

눈은 아직 덜 풀려 초점이 보이지 않지만 향긋한 빵 냄새에 괜스레 미소를 지어본다.

"아, 좋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그냥 이런 일상이 오랜만이라서."

"오후에는 밖에 나가자."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어디든, 장소는 상관없어."

오후의 햇살은 상쾌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쳐다본다. 눈앞의 대상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우리들의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춘 것만 같은 느낌.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다울 수 있다고 해."

"누가 말한 거야?"

"어느 책에서 봤어. 사실 많이 힘들었거든. 외국에서 생활하는 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우린 서로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언제나 술을 마시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 빠져있었을 뿐.


꽤나 어린 나이부터 모델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감각과 몸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각광받는 떠오르는 신인이었다고 한다. 곧 외국의 유명 에이전시에서 함께 패션쇼를 하자는 제의를 받고 곧장 외국으로 떠났다. 그 후로 약 20년 동안 쭉 외국에서 생활했다.


"처음엔 좋았어. 모든 것이 다. 근데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 향수병이 정말 미치도록 힘들게 했어. 온종일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화려한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하고 내려와 불 꺼진 텅 빈 방을 나 혼자 들어가야 했을 때, 그때의 박탈감. 그 안에서 나는 더 이상 화려한 모델이 아니었던 거야."


"그럴 땐,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지. 이 사람들도 다 어딘가에 힘들고 아픔이 있을 거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나와 다르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서 종종 써먹던 방법이었지." 처음 듣는 그녀의 이야기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고민했다. 역시 다른 세계 이야기,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의 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입을 떼었다.


“바에서도 거의 보던 사람들을 보게 돼. 내 가게는 번화한 중심 거리에 있지만 그곳에서도 제법 찾아가야 하는 위치에 있지.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바의 단골들. 그 외에는 거의 근처의 비즈니스 회사원들.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했어. 며칠 전에는 단골에게 내 과거사를 말해버렸지. 원래 바텐더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아. 친한 단골이어도 말이지. 들어주는 쪽에 가깝거든. 근데 그 날은 나 자신이 어떻게 된 것처럼 술술 말하고 있었어. 털어놓고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던 일들이 별 일이 아닌 것들이 되었어.”



말이란 것은 묘한 힘이 있어서 그저 입 밖으로 내뱉은 것만으로도 힘이 날 때가 있다. 혼자 끙끙 앓고 있던 생각들도 털어내면 별 거 아닌 일들이 되어버린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안아주었다.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를 만난 지 4년의 시간이 흘렀다.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서로가 평범하지 못했다. 바텐더와 모델. 여느 직업군과는 조금 다르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어쩔 때는 아침에 눈 코 뜰 때 없이 바쁘다가도, 어느 날은 한가하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비록 저녁 시간대에 일을 하는 바텐더지만 낮에 이것저것을 하다 보니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에서 오는 피로감도 상당했다.


서로 붙어있는 것으로는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한동안 되돌아온 원래대로의 생활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침 기상 알람에 눈을 떠도 다시 잠든다. 다시 눈을 뜨면 오후 2시경. 에스프레소 한잔을 뽑아 놓고 정신을 차리려 애쓴다. 찬물에 세수를 한다. 얼굴이 저릿할 정도의 차가움에 잠이 달아난다. 수건으로 벅벅 얼굴을 닦다가 거울을 바라봤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잠깐 멈추다 말 비가 아니다. 오늘은 어쩐지 바에 손님이 많을 것 같다.


그녀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잘 지내냐는 문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헤어진 사이는 아니고 잠시 서로 피로, 아니 권태기라는 것을 겪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자고 말했다. 따지자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뿐이었다.


그 길로 우리는 잠시 헤어졌고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답장을 바로 할 수 없었다. 손님을 맞이하느라 핸드폰을 만질 시간도 없었다. 이럴 때는 아르바이트생을 두고 싶지만 그렇게 크지도 않은 바인데 알바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렇게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조금 한가해질 무렵에서야 겨우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썼다 지우기를 열 번도 넘게 반복하다가 ‘응, 괜찮아 오늘 좀 볼 수 있을까?’라는 답장을 보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답장을 받았다.

‘좋아.’



바가 문 닫기 직전 그녀가 왔다. 나는 바 문 밖의 푯말을 돌려버렸다. 지금 이 바에는 나와 그녀 단 둘 뿐이다.

우리는 진 샷을 한잔씩을 마셨다. 알싸한 진의 향에 은은하게 풍기는 레몬의 향은 그 어떤 것보다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생각해 봤어? 우리 관계 어떻게 될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자격지심이 있었던 거 같아. 바텐더라는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모델은 나에게 있어선 연예인과 같은 사람이니까. 화려한 그쪽 세계를 보다가 나 자신의 처지를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솔직한 진심을 이야기한다. 지난번 파티에서도 보았듯이 그녀가 어울리는 부류는 제법 번화한 거리의 골목에 있는 작은 바의 바텐더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지라도 말이다.


“난 당신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어. 솔직히 전에 다니던 바들은 하나같이 주인들이 뭔가 이상했거든 괴짜였지. 그리고 어떻게든 나와 친하게 굴려고 하는 사람들뿐이었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았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줬잖아. 당신의 눈빛은 날 편안하게 만들어.”

나는 바 안의 작은 냉장고 안에서 캔 맥주 한 개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바텐더는 섞는 사람이야. 항상 무엇인가를 섞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는 사람이지. 그런데 가끔은 그게 싫어. 그럴 때는 이 캔 맥주를 마시지. 아무것도 없는 맥주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맥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무엇도 섞을 필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그 말이 끝나고 우리는 키스를 했다. 약간의 취기가 어우러진 숨결이 느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냥 그런 분위기에 취해 버렸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곁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어두운 바 안에 들어왔다. 서둘러 시간을 보니 점심이었다. 생각보다 늦게 일어났다. 곧바로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한다. 마땅한 재료는 없지만 솜씨를 발휘해 본다. 그럭저럭 먹을 만한 음식이 나왔다. 그녀는 햇살이 투명한 얼굴을 비추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다행히 오늘은 일이 없어.” 자다 깬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담요를 몸에 대충 걸치고는 바에 앉는다.

“그래서 마스터. 오늘 메뉴는 뭐죠?” 능글맞은 목소리로 그녀는 귓가에 속삭였다.

“바텐더가 대충 만든 크림 파스타입니다.”

"뭐야 그게, 네이밍 센스 꽝!"

그런 말을 하며 우리는 동시에 크게 웃었다.

“여행이나 가지 않을래?” 파스타를 먹으며 나온 그녀의 말은 제법 엉뚱한 것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어 졌어.” 그녀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바닷가라, 몇 년 전에 가보고 안 가봤네. 생각해 둔 곳 있어?”

“아니, 바다가 보이는 곳이면 충분해.”

"근데 바는 어쩌고?"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아."


오후 2시. 우리는 바다를 보러 떠났다. 길은 한없이 넓게 펼쳐져 있고, 햇살은 사그라지듯 사그라지지 않은 그런 길. 창문을 내리고 손을 내민다. 하늘하늘한 바람이 손등을 타고 스친다. 솜사탕을 쥐고 있는 좋은 느낌이다.

1시간 하고도 30분이 더 걸려서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파라솔을 펴고 그늘에서 쉬고 있었고, 또 몇은 바다에서 바나나 보트를 즐기고 있었다.


“생각했던 풍경이야?”

“그러네. 조금도 다르지 않아. 확 트인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시원해진다.”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푸른 바다와 하얀 물살이 넘실거리는 파도와 고운 감촉으로 발을 감싸주는 백사장 아래에 우리들은 서 있었다.

“확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이대로 우리 둘만.”

“그럴까?”

영혼이 없는 대답에 팔꿈치로 옆구리를 맞았다. 지금 사라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아?라는 그녀의 핀잔도 들렸다. 억울하다. 먼저 사라지자는 이야기를 꺼낸 건 그녀다.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은연중에 깨달았다.


어느 순간, 우리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같이 있지 않았던 시간 동안에 우리의 시간은 자물쇠를 단 것처럼 닫혀 있었다. 바람에 바다 냄새가 실려 왔다. 비릿한 냄새는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깨우기 충분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근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사서 그녀에게 하날 건넸다. 펑하고 터지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커피를 꿀꺽 한 모금 마셨다. 바다에서 풍겨오는 짠 내와 커피의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뭔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서로 연락도 안 하고 지냈을까?"

"지쳐있던 걸지도 모르지, 서로에게 말이야.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솔직히 말해봐. 그동안 내 생각 하긴 했어?"

조금 머뭇거리며 응. 하고 대답했다.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 다만 생각이 많아져서 연락이 늦었어. 미안해."

그녀는 곧 행동을 개시했다.

"그럼 화해의 의미로 바다에 왔으니까 빠트려도 되는 거지?"


그녀가 나의 손을 잡고 바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잠깐만! 을 외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빠지고 나서야 '아, 옷 한 벌 밖에 없는데' 싶었다. 차분하게 계획을 짜서 온 여행이 아니다. 즉흥 여행에 여벌의 옷 같은걸 준비했을 리가 만무했다. 잠시 멍해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물장구를 쳤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른 것은 없었다. 둘 뿐이었다.


바의 단골이 말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생은 별 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지레짐작으로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그게 일이든 사랑이든 말이다. 그때는 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쥐 꼴이 되고서도 서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라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 그게 참 고마운 것이라는 것.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사랑도 할 것이고, 때로는 다투기도 할 것이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이 있는 한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니까. - fin.


Bar Mistyblue - drawn by Erebus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 생각이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