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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 아델 Jan 22. 2021

바르셀로나 하우스메이트 Compañero de Piso

나의 바르셀로나

하우스 메이트 Compañero de Piso

한 집을 쉐어하는 하우스 메이트를 스페인어로는 꼼빠녜로 데 삐소 Compañero de Piso라고 부른다. 쉐어하우스에 살면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처럼 하우스 메이트들과 집에서 같이 식사도 하고 거실에서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 세계의 하우스 메이트는 내 기대와 많이 달랐다. 내가 지냈던 집의 메이트들은 모두 다른 시간에 출근해서 다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 화장실이 붐비지 않아 좋았지만 생활하는 시간이 달라 집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한 집에 살면서도 통성명 이외에는 말할 기회가 없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트는 게 더 어려웠다. 거실이나 부엌에서 마주칠 때면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빠르게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카탈루냐 사람 4명과 집을 쉐어한 친구는 비슷한 나이 때에 다 같이 어울려 지내는 집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그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일 서운한 마음이 쌓였는데 네덜란드 사람인 내 친구 앞에서 모두들 카탈루냐어로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탈루냐어만큼 스페인어도 하고 내 친구의 스페인어가 막힘없이 대화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 앞에서 항상 그녀가 100% 이해하지 못하는 카탈루냐어로만 대화했다고 한다.


시간과 마음을 비롯해서 문화, 생활방식, 예의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부분들이 맞아야 하우스 메이트들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보았던 친구 같은 하우스 메이트를 만나는 게 나에게는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라울과 라디야 Raul y Radiya


라울과 라디야는 첫 번째 쉐어하우스의 메이트들이다. 라울은 바르셀로나 근처 작은 도시 출신으로 바르셀로나에서 IT 엔지니어로 일하는 친구였다. 서글서글 착한 외모만큼 성격도 무난했다. 한국에서 온 친구가 일주일 동안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것도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먹는 것도 모두 흔쾌히 허가를 해주었다. 깐깐하게 구는 메이트 중에는 친구를 집에 초대했을 때 그 사람이 사용하는 전기와 물까지 따져가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이런 여유가 있는 건 아주 좋았다.


서로 바빠서 마주칠 일도 없었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불만 없이 5~6개월 지냈을 무렵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하우스 메이트 셋이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 화장실, 부엌을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청소했는데 라울이 자기가 맡은 곳을 청소하지 않았다. 주말에 해야 되는 청소를 그다음 주 평일에 미뤄서 하다가 이 주에 한 번씩만 청소를 하더니 마지막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다른 메이트와 나는 바쁜 라울을 위해 그가 맡은 곳까지 청소를 해주었지만 고맙다는 인사한 번 받지를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서는 본인이 식사한 설거지도 하지 않아 며칠 동안 부엌을 쓰지 못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다른 메이트와 한참을 고민해서 최대한 예의 있게 부탁했지만 주의하겠다는 답만 보낼 뿐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덕분에 다른 집으로 이사할 때 뒤돌아보지도 않고 아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라디야는 라울이 렌트한 집에서 같이 지낸 메이트였다. 고향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하엔 Jaén, 대학 공부는 세비야에서 마쳤다고 했다. 이름도 외모도 아랍계 피가 섞인 전형적인 스페인 남부 여자였다. 바르셀로나에 비슷한 시기에 도착해 친구가 많지 않았던 우리는 서로에게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친해졌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자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싶었던 나는 어렵지 않은 주제로 얘기해 주는 그녀가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라디야의 반복되는 인종차별적 발언과 심각한 신데렐라 콤플렉스 때문에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바르셀로나까지 온 그녀의 목표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자라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할 때에는 돈 많은 아주머니의 아들을 소개받겠다며 매장에 오는 손님들을 골라서 도와줬다. 저녁식사를 하는 식당에서는 옆자리 남자의 시계 브랜드를 확인하고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매번 충격적인 그녀의 행동에서 가장 무서웠던 에피소드는 라디야가 가스 회사의 콜센터에서 일했을 때였다. 한 고객이 가스비가 과도하게 나왔다며 확인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기록을 확인해보니 그 고객이 바르셀로나에만 집이 여섯 채가 있는 부자였고 이렇게 그를 알게 된 게 운명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는 주소를 찾은 라디야는 그 집 앞까지 찾아가 가장 위층에 사는 그 사람의 집을 보고 왔다고 했다. 그녀는 신나서 나에게 영웅담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어딘가 순진한 구석이 있어 정신을 차릴 거라 믿었는데 가망이 없어 보였다. 처음 두세 달 같이 이야기하면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아쉽게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에르난과 술레 Hernan y Zule


두 번째 쉐어하우스를 렌트해 주었던 에르난은 아주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80~90년대 유명한 모델이었다고 한다. 키가 크지는 아니지만 스페인에서도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운동선수처럼 탄탄한 몸을 갖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내 주변에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유명한 자기를 못 알아봐 주는 내가 답답했는지 신문이나 잡지에 이름이 나오면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 집에는 세입자에게 과한 규칙들이 많아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 규칙만 잘 지키면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에르난은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깔끔해서 직접 집을 청소했는데 웬만한 호텔보다도 깨끗해서 나는 내 방만 잘 정리하면 됐다.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지만 가방을 소매치기당해서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무료로 열쇠를 해주었던 일처럼 종종 배려를 보여주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급하게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바르셀로나의 짐을 정리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줘서 일이 잘 처리되었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술레는 나보다 이 집에 2년 먼저 들어와 내 옆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는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 부엌에서 마주칠 때 가끔 대화하는 것 이외에는 얘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걸 포기하고 난 후였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술레와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술레의 바르셀로나 생활도 베네수엘라를 탈출해 콜롬비아에서 지내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대충 알고 있었다. 매일 밤 그녀 방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술레는 매일 밤 온 가족과 통화를 했다. 오래된 집이라 벽이 꽤 두꺼웠는데도 목소리가 워낙 큰 덕분에 대화가 들렸다. 벽을 뚫고 들리는 두 박자 느린 스페인어는 베네수엘라 억양까지 더해져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세세한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엄마, 아빠, 온 가족의 인사말이 따뜻하게 들렸고 가끔은 외로운 내 마음도 술레 가족의 인사말을 들으며 위로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락다운이 시작되고 내가 한국으로 탈출하기까지 열흘 동안 집에는 나와 술레 둘만 있었다. 집 안에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술레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체크하기도 했다.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두 달 뒤에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고 한국으로 왔는데 일 년이 거의 지난 지금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다. 문자 한번 보내봐야겠다.






상상 속 쉐어하우스


바르셀로나에서의 삶을 계획하면서 떠올렸던 수많은 그림 중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건 극히 일부였다. 쉐어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나의 기대는 바쁜 생활과 무관심으로 상상 속의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서 지낸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나름대로의 좋은 시간들도 있었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생활방식을 배운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다.











나, 아델


한국 회사 생활을 정리한 후 3개월 동안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을 보낸 바르셀로나는 꼭 살아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고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다시 떠나 5년이라는 시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사람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 되었고 다양한 국적의 유럽 사람들은 내 회사 동료 혹은 친구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도시 자체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미워하는 마음도 크기를 같이 하고 있다.


'나의 바르셀로나'는 이런 기억들을 조금씩 적어보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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