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를 바라보자...금강산 1만2천봉을
[트래블바이크뉴스=최승언기자] 요즘 연일 북한의 핵무기에 문제로 세계가 시끄럽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북한정권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간의 설전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
권력자들과 달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없이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 사람과 물자가 다시 자유롭게 오고갈 날이 있을 것이다. 북한에는 보전되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명소들이 많다. 전쟁을 막아야 그들 명소도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은 1998년부터 우리도 방문이 가능했지만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병사의 총에 피격되어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당시 시인 고은은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통일을 염원했다.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금강산 1만2천봉을/ 나도 모르게/너도 모르게/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중략/ 이제는 하늘의 선녀로 내려와/실한 나무꾼 만나/서로 익어가는/사랑의 눈으로/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금강산은 자연자체도 아름답지만 곳곳에 사찰과 석탑, 불상 등이 있어 명소 중의 명소다. 반드시 훼손 없이 다시 통일한국의 품에 안겨야 할 민족의 유산이라 소중하다. 금강산 말고도 볼거리가 무궁하다. 북한에서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한 박연폭포는 한국 3대 폭포 중 하나다.
폭포의 높이 37미터, 너비 1.5미터로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더불어 3대 명폭으로 꼽힌다,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셋을 송도삼절이라고 한다.
박연이라는 사람이 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폭포 못 속에 사는 용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연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해 자신도 폭포에 몸을 던졌다. 이후 폭포 밑의 못을 ‘고모담’이라 했고 폭포는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죽교는 북한이 지정한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다. 고려 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보낸 사병들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고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이 쓴 비가 있다. 다리 난간은 정조 시대에 가설하였다. 비각이 있는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개가 들어 있다. 정몽주가 피살되고 참대나무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외에도 함경북도의 칠보산이 외국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택리지의 이중환은 “함경도 일대는 산이 크기만 하고 계곡이 황량하여서 명산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오직 명천에 있는 칠보산의 형상이 귀신의 솜씨인 듯하다”고 평가했다.
함경북도 명천군 보촌리에 위치한 칠보산은 해발 8백94미터다. 일곱 개의 산이 하늘높이 솟아 칠보산이라 했는데 여섯 개의 산이 바다에 가라앉고 산 하나만 남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함경북도의 8경으로 꼽히는 칠보산에는 개심사가 있다. 개심사 동쪽에 ‘제1강산’이라고 쓰인 바위가 있어 온 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칠보산의 개심사는 청태조의 선조였인 주대명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전설은 개심사 주지가 아침밥상에 내려온 큰 거미를 밥을 주어서 키웠는데 거미가 아이를 낳고 사라졌다.
사라진 거미줄이 백두산 정상까지 이어졌다 해서 아기이름을 ‘거미 주(蛛)’에서 착안하여 ‘주(朱)’씨로 하고 이름을 대명이라 했는데 주대명의 자손이 금나라의 황제가 되고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최승언 기자 travel-bik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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