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여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기묘하게 교차해 온 땅, 마카오.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로서 낡고 아스라한 남유럽의 정취를 간직했던 이 작은 도시는, 이제 아시아 최대의 카지노와 거대한 자본이 집약된 눈부신 욕망의 용광로가 되었다. 세월의 풍파를 맞은 성 바울 성당의 유적과 코타이 스트립(Cotai Strip)에 우뚝 솟은 메가 리조트들의 극명한 대비는 이 도시가 가진 가장 매력적이고도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베네시안(The Venetian) 호텔에 들어설 때면, 나는 늘 한 명의 철학자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주창한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원본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물이 현실을 대체하여 새로운 기호의 세계를 구축하는 현상을 말한다. 베네시안 호텔은 어쩌면 이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화려하고 압도적인 시뮬라크르일 것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St. Mark's Square)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거대한 마크스 스퀘어, 365일 비가 내리지 않고 황혼도 지지 않는 푸른빛의 인공 하늘, 그리고 호텔 내부를 유유히 관통하는 실내 운하와 사공(곤돌리에)들의 칸초네 노랫소리. 이 철저하게 계산되고 통제된 거대한 인공의 세계 속을 걷다 보면, 어느새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묘한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규모가 워낙 방대한 탓에,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마치 미궁 속에 던져진 신화 속 인물처럼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명품 숍의 쇼윈도가 뿜어내는 시각적 포화 상태 속에서 나 역시 예외 없이 길을 잃고 말았다. 지도를 쥔 손은 갈 곳을 잃었고, 진짜 베네치아의 축축한 공기와 낡은 벽돌 냄새가 부재한 이 매끄러운 가짜 공간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가장 선명하고 '진짜'인 감각을 은연중에 갈망하고 있었다.
오직 화려한 시각적 자극만이 가득하던 이 인공의 미궁에서, 당황한 나를 구원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후각이었다. 복잡한 교차로 한가운데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가늠하던 내 코끝을 이질적일 만큼 매혹적인 냄새가 덮쳐왔다. 그것은 우리가 도심의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 주변을 지날 때 맡게 되는 짙고 매캐한 상업적인 탄내가 아니었다. 마치 갓 피어난 봄날의 정원 한가운데 서 있거나, 잘 숙성된 과일 바구니 앞을 지날 때 느낄 법한 복합적이고도 은은한 아로마였다. 시각이 길을 잃자, 잠들어 있던 후각이 깨어나 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주기 시작했다.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겨 냄새의 근원지에 당도한 순간, 나는 가벼운 탄성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치형의 기둥과 앤틱한 타일,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바리스타들의 진지한 몸짓이 어우러진 카페, 바로 '더 커피 아카데믹스(The Coffee Academics)'였다. 이 간판을 마주하자마자 나의 기억은 수년 전 홍콩의 덥고 습했던 어느 여름날로 단숨에 나를 데려갔다. 당시 코즈웨이베이의 번잡한 인파를 피해 우연히 숨어들었던 작은 골목에서 나는 이 스페셜티 커피 명가를 처음 만났다. 그곳에서 땀을 식히며 마셨던 한 잔의 산미 가득한 커피는, '커피란 응당 쓴맛으로 먹는 어른들의 각성제'라는 나의 오랜 타성을 완벽하게 깨부수어 준 개인적인 미각의 혁명이었다. 2012년 홍콩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으로 꼽히는 이 학구적이고 진중한 이름의 공간을, 가장 화려하고 인공적인 마카오의 복제된 운하 한가운데서 우연히 다시 조우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강렬했던 미각적 기억이 이 낯선 공간에서 기묘한 기시감으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나를 포함해 한국의 많은 여행자들은 커피에 관해 꽤나 보수적인 입맛을 가지고 있다. 거대 프랜차이즈의 아메리카노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탓에, 강하게 볶아낸 다크 로스트 특유의 쌉쌀하고 묵직한 맛을 커피의 스탠더드로 여기곤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대량 생산의 맛이자, 어느 도시를 가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획일화된 안전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카데믹스에서 주문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내 미각을 지배해온 그 견고한 안전지대는 다시 한번 경쾌한 파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잔에 입술을 대고 조심스레 들이켜는 찰나, 가장 먼저 혀끝을 감도는 것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뾰족한 신맛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일이 품고 있는 생명력 넘치는 새콤함, 즉 기분 좋고 화사한 산미(Acidity)였다. 부드러운 텍스처가 입안을 둥글게 감싸고 돌았고, 커피를 목으로 넘기고 난 뒤에는 코끝을 타고 올라오는 은은하고 매혹적인 꽃향기(Floral)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상위 5%의 질 좋은 생두를 섬세하게 로스팅해 원두 본연의 캐릭터를 극대화하는 '스페셜티 커피'의 진수였다. 그것은 그저 잠을 깨우기 위해 들이켜는 검은 액체가 아니라, 한 알의 원두가 자라난 흙과 햇빛, 바람의 시간인 테루아(Terroir)를 존중하고 그 고유의 개성을 한 잔의 잔 안에 온전히 담아내는 정교한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마치 오랜 시간 공들여 빚어낸 한 잔의 고급스러운 홍차나, 섬세한 구조감을 지닌 내추럴 와인을 음미하는 듯한 우아함이 그곳에 있었다.
그 첫 잔이 선사한 긍정적인 미각의 충격은 이번 마카오 여행의 일상적인 패턴마저 완전히 바꿔놓았다. 마카오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베네시안 마크스 스퀘어로 향하는 것이 나의 성스러운 의식이 되어버렸다. 숙소의 포근한 침구를 뒤로하고 굳이 넓은 호텔의 복도를 한참 가로질러 그곳으로 향한 이유는 명확했다. 매일 아침, 아카데믹스의 그 화사하고 생동감 넘치는 커피로 하루의 첫 감각을 깨우지 않으면, 마카오에서의 여행 스위치가 제대로 켜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흘간 일행과 함께 마신 커피는 총 여섯 잔. 결제된 금액을 확인해 보니 한화로 약 4만 원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한 잔에 약 7천 원 후반대에 달하는 이 가격은 일반적인 프랜차이즈 커피 가격과 비교하면 솔직히 흠칫 놀랄 만한 수준이다. 일상의 기준에서는 분명히 비싼, 이른바 '작은 사치'라고 부를 만한 지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치(奢侈)의 진정한 의미가 그저 재화를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부재했던 특별한 미학과 취향을 내 삶에 새롭게 부여하는 행위라면 어떨까.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스페셜티 원두의 퀄리티, 그리고 무엇보다 베네시안 호텔 내부라는 압도적인 공간이 주는 철학적 프리미엄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 지출은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낭만적인 영감에 대한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경험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공간이 주는 지독한 역설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복제된 가짜 하늘 아래 앉아, 가장 자연 친화적이고 원초적인 떼루아를 머금은 진짜 커피의 맛을 음미한다는 사실. 인공의 베네치아 운하를 배경으로 입안 가득 번져나가는 한 잔의 꽃향기를 사유하는 그 순간만큼은, 마치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를 꽃피우던 진짜 산마르코 광장의 철학자가 된 듯한 충만함을 느꼈다. 매일 아침 지갑은 조금씩 가벼워졌지만, 나의 감각과 사유의 창고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풍요롭게 채워지고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 익숙한 일상의 굴레 속에서 딱딱하게 무뎌진 나의 감각들을 낯선 공간의 힘을 빌려 새롭게 벼려내는 과정이다. 완벽한 시뮬라크르의 공간인 베네시안의 화려한 풍경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카데믹스에서의 커피 타임은, 이번 마카오 여행에서 나를 가장 선명하게 일깨운 결코 잊을 수 없는 미각의 기억이자 인문학적 발견으로 남았다. 가짜 하늘 아래서 마주친 가장 진짜다운 맛의 발견. 그것은 지도를 잃어버리고 당황했던 여행자에게 낯선 공간이 기꺼이 내어준 예상치 못한 선물이자 따뜻한 위로였다.
만약 당신이 조만간 마카오 베네시안 호텔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화려한 카지노의 현란한 불빛이나 수많은 명품 숍의 쇼윈도에만 시선을 온전히 빼앗기지 않기를 권한다. 북적이는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마치고 마크스 스퀘어로 이어지는 웅장한 길목에 접어들 때, 거대한 복제의 미궁 속에서 문득 방향을 잃었을 때, 억지로 지도를 들여다보려 하지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추어 보라. 그리고 공기 중에 조용히 흩어지는 향기에 당신의 후각을 온전히 맡겨보라. 평소 쓴 커피만을 고집하며 커피의 산미에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곳 바리스타들이 선사하는 화사한 아메리카노나 섬세한 질감의 라테를 꼭 한 번 경험해 보기를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그러니 여행지에서는 가끔 길을 잃어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꽉 쥔 지도를 덮어버리고 기꺼이 낯선 미궁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우연하고도 아득한 헤맴의 끝에서, 단조로웠던 당신의 감각을 두드려 깨워줄 '새로운 세계'가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여행이 우리 삶에 남기는 진짜 영감과 눈부신 발견은, 언제나 철저한 계획의 한복판이 아닌 우연이 빚어낸 틈새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