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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을 Jan 14. 2023

쌀국수가 그리운 이유

항공기에서 내리자마자 어마어마한 습도가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축축한 공기였다. 이게 동남아의 습도인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착륙 직전의 상황이 너무도 스펙터클했다. 처음 탄 국제선 항공기에서 두 번의 고어라운드를 경험할 줄이야. 공포증이 생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예상 도착 시각보다 훨씬 늦어서인지 공항은 복잡했다. 아무래도 날씨 탓에 호치민 상공을 빙빙 돌기만 했던 항공기가 한꺼번에 착륙해서 그런가 싶었다. 


공항 앞에 줄지어 선 택시 중 하나를 잡아탔다. 무작정 시내로 가자고 이야기했다. 숙소 같은 것은 예약하지 않았는데, 벌써 밤이 다가오는 듯했다. 아직 시차를 실감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지만, 아침에 출발해서 초저녁에야 도착한 것쯤은 알 것도 같았다. 하늘이 이렇게 어두우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늘 위에서만큼은 아니지만, 호치민에는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택시의 뒷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여기가 베트남이구나. 


택시는 우리를 시내 한복판에, 말 그대로 시내 한복판에 떨구고 떠났다. 여행자라는 거 뻔히 알았을 텐데,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에라도 내려주지. 계획이라고는 전혀 없이 출발한 여행이었기에 나중에야 데탐 스트리트라는 여행자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호텔이 몇 개 있었다. 고급 호텔을 갈 정도의 돈은 없으니, 일단 호텔이라는 이름만 붙은 곳이라면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었다. 


로비는 좁았다. 우리집 거실보다도 좁은 로비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니. 호텔 맞아? 그래도 일단 몸 뉘일 공간을 빠르게 찾았다는 점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어차피 여행 내내 여기서 묵을 것도 아닌데. 하루 30달러도 채 되지 않는 요금이 마음에 들었다. 의류 세탁은 다림질까지도 무료. 심지어 쌀국수를 조식, 그것도 룸서비스로 제공해 주기까지 한다니. 선생님들, 이게 베트남의 물가라는 것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의도치 않게 길어진 비행 시간 탓에 배가 고팠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역시 현지 음식과 함께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켜는 것. 로비에서 근처에 쌀국수를 먹을 만한 곳을 물었다. 다행히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시장이 있단다. 거기에 가면 널린 게 쌀국수라는 리셉셔니스트의 말. 그래요. 내가 그거 먹으러 여기까지 온 거라니까요. 


쌀국수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게살파인애플볶음밥이 있길래 그것도 하나 주문했다. 맥주도 주문했다. 병맥주와 얼음이 담긴 컵을 함께 주길래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 뒤 병만 받았다. 이 친구들, 어떻게 맥주를 얼음까지 타서 마시나. 다행히 병에 들어 있는 맥주만으로도 청량감이 느껴졌다. 아, 베트남이구나. 


묘하게 고기 냄새가 나는 쌀국수는 한국 돈으로 2천 원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맛만큼은 훌륭했다. 피곤, 허기짐,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더해져 이루어낸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게살을 정성껏 발라낸 뒤, 구운 파인애플과 함께 내어주는 볶음밥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아니, 밥을 파인애플에 얹어서 준다니. 주문하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퀄리티 아니던가. 시장에서 이런 수준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줄이야. 베트남, 너의 매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니. 


그다음 날부터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쌀국수와 볶음밥을 찾아 다녔다. 여행 중 잠시 쉬면서 맛보았던 연유커피와 치즈케이크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심지어 한 정갈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는 자신들의 메뉴에 없으면서도, 마치 좀비처럼 쌀국수를 찾아다니는 나를 위해 한 그릇 말아주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이라고 할 수 있겠나. 호텔 조식으로 나오는 쌀국수도, 길가 좌판에서 파는 쌀국수도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감탄, 또 감탄의 연속이었다. 


한 음식에 꽂히면 며칠, 길게는 몇 달 내내 그것만 먹는 성격이긴 하지만, 생애 첫 해외여행을 가서까지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기까지 했다. 정말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맛있다고? 단언컨대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베트남의 시장에서 맛보았던 쌀국수보다 더 맛있는 쌀국수를 맛본 적이 없다. 물론 추억 보정, 여행지 보정도 있겠지만. 


동남아시아 = 쌀국수라는 환상이 깨진 것은 국경에서였다.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국경을 넘자마자 들렀던 휴게소에서도 여지없이 쌀국수를 주문했는데, 정말이지 형편없었던 것. 그제야 깨달았다. 세계 3대 미식 국가로 알려진 중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이야말로 진정한 맛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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