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작년 여름, 이 브런치를 시작할 당시 나는 우울증의 늪에 발을 막 들인 참이었다.
말로만 듣던 우울증이 내게도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전까지 나는 단지 기분이 우울하다는 이유로 어떻게 사람이 죽음까지 몰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겪어보니 우울증의 위력은 실로 위대해서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살아가는 행위가 그렇게 버거울 수가 없었다.
나를 가장 괴롭힌 생각은 여태까지 쌓아온 내 경험이, 나란 존재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자괴감이었다.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믿었던 활동들이 취업의 문턱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곧바로 그에 매진했던 내 존재까지 가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영화책방 35mm'와 '퍼플레이'가 함께 주관한 영화모임 '펖콘'을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그 모임은 첫 모임에서 마지막을 논했다.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엔딩 장면에 대해 말하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두운 터널을 걷던 그 시기,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 항상 나를 옥죄었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내가 겪은 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서 어떻게 헤엄쳐 나왔는지 들려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책방 입구에 적힌 <트루먼쇼>의 명대사가 보였다.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모두 거짓인 걸 알고 난 이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용기 있게 나아간 트루먼이 우울의 터널에 갇힌 내게 인사를 건네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은 과거 우울증을 겪었노라고 고백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들었다면 나는 그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흘려들었을 것이다. 우울증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것인지 알게 된 이후에는 그 말을 절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직 우울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때의 나에게 무거운 고통을 이겨내고 비로소 삶의 희망을 찾아낸 그들이 위대한 영웅처럼 보였다.
우리는 쉽게 특별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을 구분 짓는다. 특별한 사람은 책이나 텔레비전에만 있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하다고 단정 짓는다. 그렇지 않다. 힘겨운 이 생애를 매일매일 살아가며 저마다의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우리는 그 자체로 특별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길을 걷다가 문득 특별한 이야기를 품고 있음에도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한 이들의 에세이를 대신 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잘것없는 실력이라도 내 능력을 통해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 서사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것을 겪어낸 당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주변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토대로 그들 시점의 1인칭 에세이를 작성했다. 점검 차원에서 당사자에게 제일 먼저 글을 보여주었다. 눈물이 났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나의 프로젝트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지 자신이 없다. 솔직히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누군가의 눈엔 결국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써왔던 글과 다르게 앞으로 이 카테고리 안에 담길 글들은 모두 특정 독자가 있다. 바로 내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 인터뷰이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그들의 인생에 언어를 붙여주고 당사자에게 그 가치를 일깨워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비슷한 경험을 겪은 독자가 공감과 위안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지만...)
<파이아키아, 이야기가 남았다>에서 만난 마거릿 애트우드의 문장을 좋아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직 이야기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적절한 언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의 삶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면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다.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이야기가 될 테니까.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Halsey의 노래 'Beautiful Stranger'에서 그대로 따와 '아름다운 이방인'이라고 지었다. 내가 아무리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에겐 당신의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