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꽃송이 Jun 11. 2019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어서-

프롤로그

#715일, 긴 여행을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른 한 살의 겨울의 끝자락에 떠나, 서른 세 살의 겨울의 끝자락에 러시아를 끝으로 긴 여행이 끝이 났다. 시베리아는 겨울이여야 한다며 그렇게 고집한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의 붉은 노을이 내 마지막 비행을 내내 뭉클하게 만들었다.


유럽,아프리카,남미,미국. 4대륙 55개국 179도시를 여행하며 있었던 일들이 두시간이 조금 넘는 비행에서 715일간의 여행은 오래된 흑백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해 열심히 손짓발짓 해가며 찾아다니던 곳들,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히이 하이킹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처음 하던 날, 아프리카에서 천원, 이 천원 아끼겠다고 흥정하고 싸우던 날들, 잘 곳이 없어 공항이며 해변이며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잤던 날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싶어 몰래 울던 날들, 좋은 동행들을 만나 늘 즐거웠던 날들, 싸구려텐트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다 죽을 만큼 아팠던 날들, 수천년동안 얼려진 빙하를 눈 앞에 두고 가슴이 벅찼던 날들, 뜨거운 사막에서 몇 번이나 일출과 일몰을 맞이하며 이런 게 인생이라 생각했던 날들, 별이 쏟아지는 허허벌판에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잠들었던 날들, 카우치 서핑을 하며 세계 각지에 돌아갈 집을 만들던 날들, 예고 없었던 늘 갑작스러운 친절과 초대받던 날들, 말로는 형언 할 수 없을 하루하루 찰나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노을과 함께 밀려 어둠으로 사라졌다.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순 없겠지만 지금 죽어도 참 괜찮았다고 생각할만큼, 날 위해 살았던 순간이 끝났다. 


참 다행인 순간들이었다.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던 내게, 고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