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난중일기
여자는 결혼하면 시집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거창하게 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요즘도 여전히 시집의 전통과 문화에 적응하는 게 결혼한 여자의 첫 번째 관문이긴 합니다. 저도 그랬어요. 결혼 전에는 모든 게 내 맘대로요, 내 기준으로 돌아갔는데 시집을 오니 세상 모든 게 다 저들 맘대로요, 저들 기준대로 돌아가더군요. 새댁 신분이라 몸가짐은 얌전히 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번번이 당황스럽고 살짝 언짢아지기도 했습니다.
그 상황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요. 순대를 된장에 찍어먹는지 고추장에 찍어먹는지 소금에 찍어먹는지로 다투는 꼴입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볼 때 그런 식이었다는 거지 당시에는 사는 방법의 차이로 나름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무엇으로 찍어먹은들 자기 입맛대로 먹으면 그만일 텐데, 그 방식이 막 새 식구가 된 저만 다르다는 게 문제였지요. 혼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딱히 무어라고 구박을 받았던 것도 아니에요. 매번 밥을 먹기 전에 물부터 한 모금 마시는 오래된 습관이나, 실속보다는 간단한 격식을 더 중요시하는 제 취향을 신기해했던 정도입니다. 하지만 낯선 가족에 둘러싸여 난생처음 ‘마이너’가 될 수밖에 없던 제 처지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억울하더라고요.
마침내 그 은은한 분노를 풀 기회가 생겼어요. 우리 아이 첫돌이 다가왔을 때입니다. 요즘에야 돌잔치를 바깥에서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그때만 해도 다들 집에서 하는 분위기였어요. 집안 잔치라는 게 대가족 시대에서 넘어온 풍속이라곤 하나 문화가 일조일석에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핵가족 시대의 수혜자였던 저는 겁도 없이 큰아이 돌을 맞아 양가 식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참에 시댁 식구에게 내 집 잔치는 온전히 내 방식으로 치러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시댁은 이북 출신이어서 항상 걸지게 차려 드시는 편이었습니다. 마치 피난민의 설움을 잘 먹는 것으로 보상받으리라 작정한 사람들 같았지요. 모양새나 그릇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되도록 푸짐하게, 한 가지를 먹더라도 옹골차게 먹자는 쪽이었습니다. 반면 친정은 외형과 격식을 더 생각하는 집안이었어요.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골고루 준비해서 구색을 갖추는 게 먼저였습니다. 아마 저는 그때 혼자 별렀던 모양입니다. 가정선생님이었던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여봐란듯이 잔칫상을 차려 내자고. 늘 시집식구들 방식에만 맞추느라 어설픈 이방인으로 눌려 있던 마음을 만회해보려던 심산이었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무모한 욕심이었는지 깨우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 하나 혼자 키우기도 힘에 겨운 새댁이 서른 명의 한정식을 준비해보겠다는 것부터가 애당초 미련한 짓이었지요. 며칠 전부터 식단을 짜고 시장을 보고 그릇을 빌리는 일만으로도 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가 되었어요. 지금 같아선 수산 시장에서 회 두어 접시 배달시키고 갈비찜 한 찜통부터 준비하면 기본이야 되었겠지만, 그때는 또 그런 요령마저 부릴 수 없는 빠듯한 신혼살림이었으니 잔손이 많이 가더라도 재료비가 덜 드는 메뉴를 골라야만 했습니다.
갖은 고생을 해가며 구절판, 해파리냉채, 모듬전, 소고기 산적, 샐러드까지는 만들었어요. 거기서 그만 멈췄어야 하는데 ‘파강회’까지 한 접시 더 하려던 욕심이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제 딴엔 싼 재료비로 미리 해놓을 수 있겠다 싶은 메뉴를 추가했을 뿐인데, 막상 잔치 전날 오밤중에야 혼자 만들면서 깨달았지요. 실파를 살짝 삶아 한 줄가리씩 돌돌 말고 마무리로 잣까지 끼워 넣는 꼼꼼한 수작업은 친정에서처럼 아낙네 대여섯이 빙 둘러앉아 일손을 놀릴 수 있는 상황에서나 가능하다는 걸요.
하는 수 없이 간간이 깨어 우는 아이를 달래 가며 조물락조물락 밤을 거의 새다시피 했습니다. 잔칫날, 일찌감치 오신 시어머니 하명으로 병풍을 내오고 실 꾸러미를 구해 오며 돌상을 준비하고, 이런저런 손님맞이를 마무리하다가 그나마 붙들고 있던 남은 혼도 쏙 빠져버렸어요. 그때 마침 친정 부모가 당도하셨죠.
오랜만에 찾아오신 부모님은 눈도 제대로 맞출 새 없이 정신줄을 놓고 돌아다니는 막내딸을 안쓰럽게 지켜보셨습니다. 저는 그 상황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이미 한 판 멋지게 차려서 폼을 재보려던 애초의 각오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요. 여기서 안녕하세요, 저기서 이거 주세요, 얘야 이리 와서 간 좀 봐라, 언니 큰 칼은 어딨어요 같은 사방팔방의 부름에 응대하러 다니는 통에 거의 미친 여자처럼 뛰어다녔거든요. 그런 막내딸을 아버지가 잠시 보자고 부르시고는 내 가쁜 숨 끝에 느리게 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정은아, 사람들은 네가 차린 음식을 먹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 안주인인 너를 만나 축하해주려고 온 것이다.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
아깝게 시집보낸 막내딸이 한 팔에 아이를 끼우고 부엌을 오가며 땀만 삐질삐질 흘리느라 안주인다운 기품은 찾아볼 수도 없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는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지이이잉 하고 제 머릿속에서 징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날 손님들은 모두 돌아가는 길에 수고 많았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시어머니에게, 시누이와 올케, 형제자매에게도 많은 덕담을 들었습니다. 음식이 맛있더라는 얘기도 들었죠. 곁에 있던 남편도 흐뭇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 마음에 남은 말은 그분들 칭찬이 아닙니다. ‘안주인인 너를 보러 온 것이다.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라는 아버지의 음성, 그것만 명징하게 남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말씀을 생각합니다. 남에게 자신을 증명하려고 뭔가 보여주는 데 골몰하여 정신을 놓을 때마다 그 얘기가 떠올라 흠칫하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그 한 마디 덕분에 제 인생을 헛된 업적에 파묻지 않고 그나마 스스로를 여기까지 온전히 끌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