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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Apr 17. 2017

내가 살던 그 집

어린 날의 추억

우리 집은 서울 돈암동이었다. 행길 건너편은 이층 양옥이 즐비한 신흥 주택지구였지만 우리 뒷동네는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까지 누덕누덕한 판자집이 천지였다. 그 달동네 입구에 자리 잡은 축대 높은 우리 집은 그래서 어쩌면 동네사람들에게는 건너편 양옥집보다 더 피부로 와 닿는 부잣집이었을지도 모른다. 양옥집 아이들과 우리는 섞여 놀 일도 별로 없었으니까.
 
우리 집은 스무 계단이나 올라가야 대문이 있는 기와집이었다. 처음에는 방이 세 개였다. 그 집에 엄마, 아버지, 할머니, 자식 다섯과 일하는 언니가 살았다. 가끔 시골에서 친척까지 올라와 서울에 직장이 잡힐 때까지 개기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런 시절의 복닥거림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나만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식구 수가 줄었는데도 다섯 자식 몸집이 커지니 집이 작았다. 방 하나를 혼자 쓴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기였지만 한 방에 셋은 조금 비좁았다.

축대 높은 집 옆으로 부모님들은 이층짜리 방을 이어 붙였다. 이층 방이 축대가 있는 원래 집의 일층과 연결되는 구조였다. 날마다 부모님이 '오까네' 논쟁을 벌여가며 겨우겨우 완성하게 된 이 증축건물은 누가 봐도 얄궂은 꼴이었지만 철없던 우리들은 상관하지 않었다.
 
우리는 모두 기와지붕 옆에 새로 생긴 이층 방 옥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거기에 평상을 올려다놓고 여름밤이면 이불을 덮고 누워서 놀기도 했다. 나 혼자 흥에 겨워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을 힘차게 부를라치면 노래 잘 하던 언니들이 하나 둘 화음을 넣어 황홀한 합창을 밤하늘에 퍼뜨리곤 했던 어린 날의 낭만. 새벽마다 일어나 코를 막으면서 연탄 구멍을 맞춰야 했던 기억, 불 때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뱀의 혀처럼 타들어가며 춤을 추던 종이더미의 불꽃에 몰입했던 저녁, 집 뒤에 있었던  공터에 오만가지 야채를 심어두고 온 가족이 물을 길러다 키우던 어린 날도 아른아른 하다.
 
그 집. 오래간만에 가봤더니 포크레인에 다 파여서 신축택지 조성 중이라고 팻말을 박아놨더라. 유적지처럼 보존되려니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짠했다. 내 어린 날이 박제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살난 채 쓰레기통에 쑤셔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득 그 어린 날의 집을 내 마음 창고에서 가만히 꺼내 글로 다시 환생을 시키고 그림까지 그리니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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