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주방장 하직인사

엄마난중일기

by 김정은

주방장 하직인사 올리옵니다. 요즘은 명예퇴직도 많아졌기에 저도 세태에 맞춰 조기퇴직 좀 해볼까 하옵니다. 애초부터 돈을 염두에 둔 일은 아니었으나 점점 심리적인 중요도마저 떨어지면서 진작부터 일할 맛이 안 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왕 시작한 거 막내가 공식적으로 성년 될 때까지는 부엌을 지키자고 저 혼자 근무시한을 정해 놓고 마음을 달래왔습니다.


실속 주안상 요리계의 전문가이신 시어머니와 폼생폼사 궁중요리계의 전문가이신 친정어머니를 모신 마당에 언제나 제 솜씨는 그만 못하여 지금까지 굴욕스럽기 짝이 없던 나날이었습니다. ‘음식은 정성’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음식에만 정성을 쏟기에는 이놈의 세월이 너무 복잡다단해졌지 뭡니까? 매번 쉽고 편하면서 보기에만 근사한 요리에 골몰했던 점 무척이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가정 식사’가 더는 중요해지지 않은 세태 탓도 있습니다. 각자 뭘 하고 돌아다녀도 될 수 있는 한 저녁때는 집에 돌아와 온 가족이 한솥밥 먹는 걸 무슨 신성한 의식처럼 생각하던 그런 시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회사회식, 젊은이는 또래모임, 학생은 야간공부로 몰려다니는 통에 주방 가동은 언제나 불규칙할 수밖에요. 냉장고에 먹다 남은 음식이 쌓였어도 막상 필요한 식재료는 때마다 똑 떨어져 커다란 냉장고가 다 무색했지요. 하지만 그거 아세요? 주방은 많은 사람이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먹어줘야 제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삼시 세 때 한 끼도 나가서 사먹을 수 없던 외국 생활, 그 궁핍한 시절이 제 주방장 생활의 황금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중고냉장고 하나 달랑 있었어도 그 속에서 맛난 것들이 무궁무진 튀어나왔지요. 왜 아니었겠어요? 시간만 나면 저마다 군침을 흘리며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고, 근처에 제 음식솜씨를 위협할 만한 싸고 맛좋은 식당이 전무하던 그때, 저는 마음껏 가정주방장의 위세를 드높이며 가족들 성원에 힘입어 신나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요샌 아녜요. 저녁마다 된장찌개 끓여놓고 퇴근 시간 쪼아대는 마누라가 무섭대고, 아이들도 천 원 몇 장만 있으면 골치 아픈 엄마 잔소리 없이 ‘손님은 왕’ 대열에 합류할 수 있으니까요. 저도 진작 외식에 길들여진 식구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따라잡기는 글렀고요. 이래저래 경쟁력이 왕창 떨어져 감탄과 칭찬으로 겨우겨우 버텨오던 이 가정요리사, 맘 떠난 지 오래랍니다.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다같이 모일 수 있는 날에는 화기애애한 식탁 풍경을 연출해본답시고 저 혼자 엉터리 문화기획자 노릇도 했죠. 파인애플 속을 파내 샐러드 그릇을 만들고, 냄새만 환상적이었던 빵을 굽겠다고 야단법석, 멋지게 테이블 세팅을 하느라고 설거지만 산더미, 밥 먹으러 빨리 안 나왔다고 식구들 앉혀놓고 일장연설, 굽이굽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식탁을 가운데 두고 우리가 나눴던 수많은 충돌, 감정, 대화, 시간은 고스란히 ‘가족’이라는 이름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인생에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던 날들을 기억하고 거기서 나오는 따뜻한 기운으로 가끔은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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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집 부엌을 완전히 닫아걸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여태 짊어졌던 일인 독재 주방장직에서 사임하겠다는 거죠. 이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제 먹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 먹을 줄 모르면 너도나도 삶이 팍팍해집디다. 보세요. 부엌 드나들면 고추 떨어진다고 얼씬도 못하게 하던 시절에 키워진 남편님들, 요즘 와서 별것도 안 해주는 주방 마나님들 세도에 얼마나 사는 게 피폐해졌습니까. 식생활을 모르고서는 아무리 세상일을 아는 척을 해도 삶이 불안할 수밖에요. 그런 의미에서 주방장으로서 제 마지막 소임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아직도 주방에서 부리던 절대 권력에 미련이야 남았지만 과감하게 접으렵니다. 세상이 변했는데 가정주부 역할도 변해야지요. 그동안 주방에서 없는 손님 기다리느라 늘 어정거렸던 저도 인생 업그레이드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는 부엌에서 무턱대고 저 좀 찾지 마세요.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스스로 찾아보고 하나씩 해결하길 바랍니다. 이 또한 그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실용적인 공부가 될 테니까요. 저도 그 사이에 이것저것 바깥세상을 배우고 적응해야 한참 남은 제 나머지 인생을 가족에게만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것 아닙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우리 가족 해피엔딩의 마지막 수순은 이 엄마의 홀로서기라는 생각이 듭디다. 그러니 이제 아장아장, 더듬더듬 세상 밖으로 조금씩 고개를 내미는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제가 여태 당신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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