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도 여행은 하고 가야지

by 우지경

어딘가에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갔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행을 하면 된다.

우리는 여행을 하러 온 거니까.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우울해져서 그 여행을 스스로 망치지만 않으면 된다.

그게 어디에서 무얼 하든, 비 오는 날을 잘 여행하는 방법일 것이다.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RHK, 2020)





“Did you bring sunhine?”

스위스 취리히의 어느 호텔을 체크인할 때 들었던 호텔리어의 경쾌한 인사말을 기억한다. 그 순간 내가 마치 여행 가방 가득 햇살을 넣어 온 날씨 요정이라도 된 냥 기분이 좋아졌다. 기나긴 비행의 고단함도 트램을 잘못 타서 방금 전까지 길을 헤매다 온 것도 잊은 채 그녀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어제까지 흐렸는데 오늘 해가 난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잘 마른 리넨 향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 도시는 날씨도 나를 배려해주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저 날씨가 좋은 날 내가 도착했을 뿐인데 말이다.

날씨가 좋으면 내 덕, 날씨가 않 좋으면 날씨탓.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싶을 정도로 여행지에서 날씨는 중요하다. 같은 장소도 어떤 날씨에 가는지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여행운 중 최고는 날씨운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닐 터. 날씨는 여행을 좌지우지하는 3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날씨 외 여행을 요소로는 동행과 기분이 있다. 금쪽같은 시간을 어렵게 내어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났을 지나고 나면 떠오르는 것이 그날의 날씨와 일행과 그때의 내 기분 아니던가. 그래서 언제 어디로 여행 갈지를 정하고 나면 반사적으로 날씨를 찾아보게 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비나 눈을 만날 수도 있고, 태풍을 만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심지어 타이완 여행에선 지진을 맞닥뜨린 적도 있다.


KakaoTalk_20210420_152020316.jpg


얼마 전 베를린에서 온 친구와 1박 2일 강릉 여행을 떠날 때, 일기예보에는 비가 올 확률이 60% 정도였다.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우산 챙겨 와!”라고 친구에게 당부했건만 청량리 역에 도착해서 보니 가방 안에 우산이 없었다. 현관을 나설 때 챙겨야지 생각하곤 잊어버린 것이다. 친구는 비가 오면 베를린에서처럼 맞으면 된다고 무사태평하게 말했다. 다행히 첫날은 날씨 요정이 부린 마술처럼 날이 맑았다. 하늘을 파랗고 소나무는 푸르고 벚꽃을 눈이 부시게 빛이 났다. 이틑 날은 구름의 낌새가 영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어제는 맑게 웃어주던 주던 하늘이 심술궂은 회색 빛으로 정색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여정을 이어 가기로 했다. 일단 중앙시장으로 가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사서 송정 해변으로 가자. 비가 오기 전에 해변의 피크닉을 즐기는 거야. 중앙 시장을 기웃거리다 닭강정을 사서 밖으로 나왔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변은 포기하고 시장 안에 앉아 닭강정을 먹었다. 닭강정이 눅눅하고 느껴졌다. 아니 눅눅해져 버린 건 닭강정이 아니라 내 기분이었다. 눅눅해진 기분으로 목적지를 명주동으로 변경했다.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비가 그치길 기다려보자. 가는 길에 건어물 가게 대덕 상회도 들르고.


대덕 상회는 시장에서 고작 5분 거리였는데 10분 이상 골목에서 길을 헤맸다. 길을 헤매는 사이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졌다. 헤매는 동안 나는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나를 원망하다가 하필 우산을 챙겨 오지 않는 날에 비가 오는 강릉의 날씨를 원망했다. 원망의 늪에 빠진 내 앞에 대덕 상회가 나타났다. 비를 피해 건어물을 고르는 나와 친구에게 사장님은 따뜻한 차를 권했다. 사양하는 우리에게 이거라도 입으라며 노란 우비 2개를 건넸다. 고작 건어물을 조금 사고 우비를 선물 받다니! 몸은 축축해도 마음은 촉촉해진 채 건어물 가게를 나섰다. 하마터면 날씨 탓을 하며 여행을 망칠 뻔했구나 안도하며.


결국 그날은 청량리행 기차에 오를 때까지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우리는 노란 비옷을 입고 같이 걸었다. 비옷을 입고 카페에 가고 와인 보틀 숍에 가고 짬뽕을 먹고 문 닫기 10분 전인 서점 ‘한낮의 바다’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샀다. 매번 비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서로의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즐겁기로 작정하고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었으니까.


서울로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비 오는 날 여행할 때 챙겨야 할 준비물은 우산보다 마음이라고.

비 좀 오면 어때, 비오는 날엔 우중 여행의 즐거움을 찾겠다는 마음.



매거진의 이전글완벽한 여행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