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니에서 생긴 일

여행의 말들

by 우지경

기대와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는 멀미의 기억과 과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도망치고 싶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상사로부터, 알쏭달쏭한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으로부터, 안돼!라고 말하는 상표 검색 결과로부터. 오래전 네이밍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다행히 그 회사에는 1달 무급휴가제도가 있었다. 다들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며 아무도 쓰지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제도였다.

"제가 먼저 무급휴가를 다녀오겠습니다."

신입 사원이 먼저 첫 테이프를 끊는다고? 하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도망이 우선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상사는 내가 없는 사이 책상을 뺄 수도 있다는 말로 겁을 줬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끝도 없이 계속되는 야근이었다. 나는 그저 이왕 도망칠 거라면 멀리 도망치자라고 생각했다.


지중해에 가고 싶었다. 터키와 그리스의 푸른 바다를 보고 싶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일 것 같아 마침 하루아침에 회사가 망해 느닷없는 백수가 된 친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실은 일로 만난 동갑내기 일 뿐 그리 친하지도 않은 친구였다. 친구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풍경이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친구는 여권을 어디 두었나 찾느라 한참을 허둥댔고, 모처럼 공항까지 배웅을 나 온

엄마는 나보다 덜렁대는 친구 모습을 보며 물었다.

"느그 둘 괜찮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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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친구가 예약한 아테네 호스텔은 기대 이하였고, 산토리니 행 배를 타려고 간 항구에선 선착장을 착각해 배를 놓칠 뻔했다. 우리는 출발 직전 여행 가방을 끌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설상가상으로 친구의 여행 가방 손잡이가 끊어져서 친구는 가방을 들고뛰어야 했다.

“지경아 먼저 가. 어서 가서 배 출발 못하게 잡고 있어.”

그 상황에서 웃으며 달리는 친구의 모습이 귀엽던지. 달리는 걸 싫어하는 나도 덩달아 웃으며 뛰었다. 겨우 탑승한 배의 갑판 위는 파티 분위기였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출발해 그리스에 다다른 청춘들이 흥에 겨워 밤을 새울 분위기였다. 나와 친구도 그 사이에 섞여 떠들썩한 밤을 보내며 생각했다. 뭐하러 객실을 예약한 걸까. 밤 새 놀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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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니에서 시간은 천천히 빠르게 흘러갔다. 붙잡아 두고 싶은 시간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스마트폰도 앱도 없던 시절이라 마음에 드는 해변에 가면 주변 숙소를 직접 둘러보고 고르기도 했다. 발품을 팔아 해변의 숙소를 둘러보는 일도 꽤 재미있었다. 그중 괜찮다 싶은 숙소를 발견하면 흥정에 들어갔다. 어느 호텔 로비에서 우리가 내일부터 좀 전에 보여준 방에 이틀 묵을 테니 깎아달라고 얘기하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키 큰 백인 남자가 매니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어떻게 그의 어머니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을 폭포처럼 쏟아내는데, 영어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느닷없이 나타나 자기 할 말만 하며 폭력을 행사한 손님은 매니저가 뭐라고 달랠 새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게 머선 일이고 모드로 멍하니 서 있던 친구와 나에게 호텔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I Love my job!


박수를 쳐 주고 싶은 한 마디였다. 다른 손님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라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빰 한대 얼얼하게 맞은 듯한 일을 겪더라고 나는 내 일을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았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네이밍을 조금 힘들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모든 네이밍 프로젝트에는 고비가 있고 그것을 넘어서고 나면 느끼는 쾌감 또한 있다고.


그 날 이후 우리 여행이 순탄치 많은 않았다. 하지는 나는 우리에게 여행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어긋남과 재미있어했다. '피타고라스 항에 내려야 하는데 피타고라스 비슷한 이름의 항에 잘못 내렸을 때, 시간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예쁜 해변에서 오징어 요리도 먹어보네.' '쿠사다시에서 트로이에 가려고 했는데 남부로 온 김에 배를 타고 여행도 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여행으로 인 해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고, 내 인생의 항로도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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