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짠 여행 계획을 던져 버리고

by 우지경

이런 게 내가 여행하면서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잘 짠 여행 계획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그곳에 갈 때까지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곳을 보기 위해

충동적으로 일정을 바꾸는 것.


-뉴욕타임스, 『작가님 어디 살아요』 (마음산책, 2018) 324p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4박 5일 간 지중해 바다 위를 떠돌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세상에 그런 여행이 존재하는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푹푹 찌는 여름날 친구와 나는 배를 타고 항구도시 쿠사다시에 도착해 에페스, 파묵칼레, 트로이를 거쳐 이스탄불까지 여정을 이어갈 참이었다. 쿠사다시 항구에 호객을 한 남자를 따라 호스텔로 가기 전까지 우리의 굳은 여행 계획은 변함이 없었다.


“대체 이 좋은 여름날 왜 트로이에 가겠다는 거예요?”

오지랖이 에게해 보다 넓은 호스텔 주인이 우리에게 물었다. 트로이의 목마를 직접 보고 싶다고 했더니 보자마자 실망할 거라고 단언했다. 그보다 페티예 같은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출발하는 크루즈를 즐기는 게 백배 낫다고 훈수까지 뒀다. 아직 한국 여행자에겐 안 알려졌지만 유럽 여행자들 사이에선 인기라나. 에게해 바다는 파도가 거세서 수영하기 어렵지만 지중해는 잔잔해서 해수욕을 즐기기 좋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파묵칼레까지 둘러본 후 방향을 꺾어 남쪽 도시 페티예로 내려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마음으로 현지 여행사를 찾아가서 단돈 20만 원에 4박 5일 숙식을 제공하는 크루즈 상품을 예약했다. 남들은 모르는 크루즈라는 말에 치밀하게 짠 여행 계획을 훌러덩 던져버리고 일정을 냉큼 바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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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가보니 말이 크루즈지 나무로 만든 전통 배를 타고 떠나는 세일링이었다. 그래도 빈티지한 배에 오를땐 한 걸음 한 걸음이 설렜다. 배 위의 일상은 꽤 단순했다. 누워 바다를 바라보거나 책을 읽었고, 배가 바다 한가운데 멈춰 서면 바다로 풍덩 뛰어들어 수 영을 했다. 오래 전의 일이라 해변의 이름은 잊었지만 세상의 모든 파란 보석을 갈아 넣은 듯한 물 빛은 기억난다. 식사는 선장과 선원이 준비해 주었는데 저녁 식사 후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온 여행자들과 둘러앉아 각자의 술을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면 갑판에 매트를 깔고 별을 보다 잠이 들었다. 작은 객실은 있지만 에어컨이 없어 선실에서 자면 찜질방에 자는 듯 숨이 막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야외 취침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낭만적이었다. 낮에는 바다 수영과 바다 멍 밤에는 별 멍. 국경을 초월한 여행자들과 대화. 모든 순간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회사가 집인지 집이 회사인지 헷갈릴 만큼 한 야근의 보상을 몰아서 받는 것도 같았다.


돌이켜봐도 전지적 현지인 시점의 참견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와 친구를 칭찬하고 싶다. 계획을 세우기 좋아하다 보니 여행을 떠나기 전 여정을 꽤 성실하게 짜는 편이지만, 공들여 짠 계획을 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뜻밖의 장소로 발길을 돌리기 위한 용기가 필요했다. 가지 못한 여행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마음도 필요했다. 그 여름의 경험이 일깨워주었다. 계획이란 그대로 지키려고만 짜는 게 아니라는 걸. 계획을 뒤집으면 또 다른 계획이 샘솟고,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또 다른 길이 보인다. 여행도.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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