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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지경 Jun 15. 2021

청파동 자취러의 사주는 부동산 큰 손

어쩌다 내집

“일 안 해도 돼. 마흔 이후엔 일 안 해도 돈이 들어와”

“네? 일을 안 하는 데 어떻게 돈을 벌어요?”

“부동산으로 벌지.”

“전 일 하고 싶은데요.”

“뭐 그렇게 하고 싶으면 취미로 해요.”


오렌지족은 아니지만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에 갔다. 90년대 말 이 대학 저 대학 캠퍼스를 강타한 바람은 사주 카페 바람이었다. 삼삼오오까지는 아니고 친한 친구 두 세명이 모여서 압구정 사주 카페에 서로의 사주에 불이 많은 지 물이 많은 지, 불도 물도 아니면 금이 많은 지 서로의 사주를 트러 갔다. 딱히 사주가 궁금했던 건 아니다. 그저 막연한 미래가 궁금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우리는 무엇이 되어 있을지. 


나는 대학 시절 압구정 사주 카페에 딱 두 번 갔는데 두 번 다 비슷한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1. 내 사주에 나무 목이 4개라 겁이 없다. 

2. 40대엔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다. 

집으로 부자가 되고 땅으로도 부자가 된다나 뭐라나. 그런데 큰돈은 대체 얼마란 말인가. 그 시절 내게 큰 돈은 등록금 이었으니, 집과 땅 값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대학교 4학년 때 구남친이자 현 남편을 만나 둘이 신촌의 한 사주 카페에 커플 사주를 보러 갔을 때도 이런 말을 들었다. “여자 친구 꽉 잡아요. 사주가 좋아.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 거야.”


스무 살 언저리에 마흔은 너무도 먼 훗날이었고, 대학교 앞 빌라에서 자취를 하는 나에게 부동산으로 버는 큰돈이 얼마나 큰돈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20대의 나는 나의 학교 앞에서 동생의 학교 앞으로 그저 이 빌라 저 빌라를 전전하는 자취생일 뿐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빠가 있는 집과 부산을 벗어나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 오직 그 열망만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왔는데 학교 앞은 부산의 변두리보다 초라해 보였고 나의 자취방은 내가 살던 부모님 댁에 비해 단출해도 너무 단출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도 나는 동생과 가구라고 부를 것이 별로 없는 투룸에 사는 자취생이었다. 학교 앞이 아니라 회사 앞이라는 것만 바뀌었을 뿐 세입자 신분은 그대로였다.


아빠, 내 연봉이 1,600만 원인데 저축은 어떻게 할까?

첫 월급을 받고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냥 마 다 써라. 그 돈으로 무슨 저금을 하노.” 듣고 보니 그랬다. 업계 1~2위라는 네이밍 회사에 당당히 입사를 했건만 회사에서는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1,600만 원을 13개월로 나눠서 준다고 했고, 내가 한 달에 수령하는 돈 120만 원도 되지 않았다. 아니 매일 같이 야근을 하던 신입사원 시절 내 월급은 고작 100만 원에 가까웠던 돈 이었던 것인가. 그래도 나는 아빠의 지당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달에 20~30만 원씩 적금을 따박따 부었다. 언젠가 내 집을 마련 하려면 돈을 필요할 것 같았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되뇌며  자동 이체를 걸었다  게다가 내 사주는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 사주가 아니던가.  


놀랍게도 내 나이 서른 나는 남편과 우여곡절 끝에 공동명의로 20평대 아파트를 샀다. 공동명의를 하면 시아버지가 언짢아 하실 거라는 시어머니의 엄포에도 ‘공동명의가 아니면 대체 어떤 명의로 집을 사라는 말씀이신가요?’라고 되물으며 서울의 한 구석에 내 집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참고로 첫 아파트에는 남편과  내 돈이 반, 은행 대출금이 반이었다. 그런데 돈을 1원도 보태지 않은 시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가 집을 살 때 공동명의를 하면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결혼 초 살던 성산동 다세대 빌라에서 옆 동네 오피스텔을 거쳐 관악구 아파트까지 3년 만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 보다 열심히 일했다. 80% 일 하는 법을 몰라서, 매번 120%, 150% 몸과 마음이 소진될 때 까지 일했다.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30년 상환 모기지론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한 몫 했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첫 아파트에서 행복했다. 난생 처음 내 집 꾸미기에 도전해 식탁은 없지만 홈바는 있는 집에서 알콩달콩 제 2의 신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나와 남편이 집주인 이름을 올린 아파트는 봉천동 언덕 꼭대기에 있어 겨울에 폭설이 오면 마을버스도 택시도 다니지 않는 아파트였다. 눈이 펑펑 내린 날 밤 아이젠도 없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심정으로 집을 향해 오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출근길 빙판에 미끄러져 한참 동안 정형외과를 들락거렸던 일도. 그렇게 눈이 올 때마다 어떻게 출근하고 퇴근할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그 아파트에 오래 살았다. 나와 남편은 그저 성실히 집과 회사를 오갈 뿐 재테크에는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주 카페에서 들은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다는 말도 잊은 채 같은 아파트에서 10년을 살았다. 그 사이 봉천동은 청림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혼수로 장만한 가구와 집을 사며 바른 벽지는 낡아만 갔다.


그러던 내가 지금 취미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취미를 일로 삼은 프리랜서가 되어 서울의 3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여기서 30평대가 중요한 이유는 20평대에는 없던 내 방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평하게 남편에게도 남편 방이 생겼다. 말도 안되게 모두가 행복한 드라마 마지막회 같은 전개는 정말 내 사주 덕분 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한 건 내 집에 대한 나의 생각과 바람이 행동이 되었을 대 내가 바라던 집이 나에게 와 내 집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 초부터 우리는 공동 가장이라고 강렬히 주장하던 남편과 우리 집 마련 연대기를 지금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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