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동환 Feb 05. 2022

나는 가수다

아버지께-동아-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조성모의 음원 테이프를 들었다. 제목부터 어린이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불멸의 사랑', 'To heaven'


조성모 1집 앨범 수록곡들은 노래를 부르고 싶게 해 줬다. 혼자 흥얼거리다가 처음 녹음을 했을 때가 5학년 때였다. 녹음이라고 거창하지는 않다. 그냥 영어 발음 연습을 위한 녹음기에 노래를 녹음했을 뿐. 그 시절에는 MR이란 개념도 없어서 멀찍이서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는.. 그런 수준이었지만 스스로 굉장히 뿌듯했다. 수 백번은 반복해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


이후,


중학생이 되어 발라드가 아닌 락에 빠졌다. 김경호와 박완규 그리고 steel heart가 나의 우상이었다.

매일마다 노래방을 들락날락하며 그들의 노래를 불렀다. 가수가 되어야겠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다. 장래희망이 가수일 정도로 노래 부르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학업과 고민거리를 잊을 수 있었고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존중해주는 시대지만 그때는 국, 영, 수가 중요한 고리타분한 세상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가수라는 꿈은 그저 머나먼 우주와도 같았다.



그런 혼자만의 열정을 표출할 기회가 왔다. 바로 수학여행에서의 장기자랑이었다. 내 인생 첫 무대였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드디어 나의 노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꿈같은 기회였다. 하지만, 1 소절을 부르고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라 부를 수 없었다. 수 백번도 부른 노래 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새하얗게 사라졌다. 전교생이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노래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야유를 받으며 무대에서 퇴장했다. 부끄러운 만큼 다음에는 절대 긴장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 번째 무대는 토론토 한인축제였다. 2000명 앞에서 노래를 해야 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소화를 잘했다.

스포트라이트 덕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긴장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18살의 나이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했다는 사실은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하지만, 딱 그때까지였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를 기회가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최신가요를 부르는 게 전부였다. 부른 노래를 핸드폰으로 녹음해서 sns에서 올리는 게 삶의 낙이였다.  

가수라는 꿈은 그렇게 지우개로 지워져 갔다.



그런 내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아버지와 연관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노래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분이다. 흥이 넘치는 남자였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하늘의 별이 되셨다. 아들로서 슬픈 감정, 미안한 감정, 우울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위한 노래를 남기는 것이었다.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유가 넘치지는 않아서 아마추어 작곡가에게 곡을 받았다. 직접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글로 담아 싸구려 녹음실에서 앨범을 준비했고 결국, 음원 출시를 했다. 스스로의 위로와 아버지의 안부를 위한 음악이었기 때문에 홍보도 활동도 하지 않아 세상 속 그림자로

금세 사라졌다.

함께 버스킹을 하는 친구와 관중들


음원 출시한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러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다.  난치병 청소년들을 위한 열린 음악회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음원 출시 이후 버스킹 활동을 꾸준히 했던 덕분에 연락이 온 것 같다. 하지만, 버스킹 활동을 하면서 나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딱히, 나의 슬픔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픔이 치유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다.



그날은 처음으로 나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초대 이외에도 의미 있는 초대가 있었다.

엄마였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하는 나를 곱지 않게 봤다. 당연히, 외동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노래방만 들락날락하니 좋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를 초대한 이유가 있다.

들려주고 싶었다.

방구석의 땡과음이 아닌 무대에서의 고음을 말이다.

우연이었을까?

무대 바로 앞자리에 엄마가 앉아있었다.

중학교 시절 전교생 앞에서 부를 때만큼 긴장감이 맴돌았다. 여기는 스포트라이트가 없어서 관람석의 사람들의 표정까지 전부 보였다.



드디어, 반주가 시작되었다.


아버지께      
                                     -동아-

늦은 밤 나를 쓰다듬어 주시며
사랑한다 말해준

가족여행 떠나 남는 건 사진뿐
엄마 아빠같이 저녁 준비했던 기억

방황했었던 바보 같은 날
언제나 믿어 주곤 했죠

남자는 씩씩하고 당당해야 돼
말해줬던 그댄 내 아버지

그대가 아프단 소식에
심장이 멈춘 듯 아파왔었죠

아픈 것도 모른 체 살아갔던 그대
떠났네요 멀리 떠나버렸죠 아버지

엄마는 잘 지내요 걱정 말아요
그대도 편히 쉬어요 우린 기도해요

잊지 못할 우리의 따스한 햇살
그댄 내 아버지 내 아버지

이 노래를 듣고 계신다면
꿈속에라도 날 반겨주세요

가족밖에 모른 체 살아갔던 그대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살다가 지칠 때 그대의
사진만 보면 눈물이 흐르죠

다음 생에도 나의 아빠가 돼줘요
정말 보고 싶네요 많이 보고 싶어요 아버지
열린음악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노래가 끝나고, 두 눈을 떴을 때

앞에서 엄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뒤로는 아빠가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가수가 되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처음으로 나는 가수였다.


요즘의 나는 관중의 인원에 긴장하지 않는다.

누구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노래 부르는 동안은 가수로 변신하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