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타기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유심히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항상 의도해서 걷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오늘 같은 경우에는 버스 기사가 내려준 곳에서 목적지인 베벌리힐스사인까지 거리가 2km가 넘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걸었다. 그렇지만, 만 보 이상을 걸어가다 보니 발목에 무리가 왔다. 며칠 동안 슬리퍼를 신고 다녀서였는지도. 그러나 아무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더라도 훗날 기억에 남을만한 그런 장소에서 쉬고 싶었다.
여행자 주제에 따지는 게 많냐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바라볼 무언가가 있는 그런 입지 좋은 곳을 선호한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눈에 띄는 곳을 발견했다. 수 백 살은 족히 돼 보이는 크고 울창한 나무였다. 건너편의 2층대형 버스도 작아 보이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나무 곁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검은 벤치 의자에 발걸음을 향했다.
In Loving Memory of Lola and Irwin Jameson
의자에 표기된 문구는 얼굴 모를 두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나눈 그들의 사랑을 저 나무는 전부 지켜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속사정을 지켜봤을 수도 있었겠다.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딱히 중요하지 않았고 추억이 담긴 어떠한 나무도 나에게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처음 만난 저 나무를 바라보며 나의 휴식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과제였다.
하지만, 생각의 변화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나무와 얽힌 추억
나에게는 그런 추억이 없을 줄 알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로라와 제임슨의 벤치 의자에게 불과 30m 거리에도 울창한 니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소년과 소년이 보였고 그들은 나무 주변을 서성이며 놀고 있었다. 문득, 남산동 놀이터에 터줏대감 역할을 하고 있는 나무가 떠올랐다. 사촌 동생과 나무를 올라타며 타잔 흉내를 내던 나의 어린 시절도 떠올랐다.그때는 나무에 매달리고 올라타고 뛰어다니는 것만으로 하루 부족했었다.
한참 동안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회상에 빠지니 금세 감정이 미묘해졌다.나무의 생명으로는 겨우 25년밖에 안 되지만 나에게는 벌써 25년이나 흘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연과 함께 놀 수 있는 순수함을 잃은 그저 바라만 보는 어른이 된 거니까. 그래서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순수함을 잃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한동안 나무들 주변을 서성이며 사색에 잠겼던 그런 하루로 오늘을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