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 순례가메뉴가 없었더라면..

맛있는 순례길 (03)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까지

by Lucia K

다행히 비는 그쳤고, 우비 없이 걸을 수 있는 날이었다. 오전엔 흐렸지만 오후로 갈 수록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서 생각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걸을 수 있었다. 첫날이었던 어제는 빗길을 걸으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걸까를 마음속으로 수백 번 말했는데, 오늘은 걷는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그냥 같은 길을 계속 걷고 있을 뿐인데, 날씨 하나에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된다.


전날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한국인 순례자들과 오전에 같이 걸었다. 겨울시즌에 걷는 사람들은 전체 순례자의 불과 2% 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겨울까미노에서는 같은 길에 있는 한사람 한사람이 소중해진다. 나보다 체력도 좋고, 걷는 속도도 빠를텐데 같이 걸어준 데에 고마울뿐이다.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약 20km 정도 걸었는데,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로 가는 넓은 평원이었다. 이곳은 순례자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길이라 여기저기에서 사진으로도 많이 봤던 곳이다. 산티아고를 여러 번 걸은 사람들이 계절별로 다른 이 길을 비교 사진으로 올린 걸 본 적도 있다. 겨울이라 휑할 거라 생각하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겨울에도 적당히 푸르고 적당히 붉은 꽤 멋진 길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에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걷고 있자니 그냥 뭐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루를 두고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순례자들의 일과는 단순하다. 그날의 걷기가 끝나면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샤워와 세탁 등을 마친 뒤 식사 및 휴식, 그리고 취침. 오늘은 어제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씻고 저녁식사 전 도시를 둘러봤다.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대성당(Catedral, 사실은 주교자성당이 맞다)이 있고 도시도 생각보다 컸다. 겨울이 아니라면 관광객들도 꽤 많이 오는 그런 도시 일 것 같은 분위기다. 성당과 광장 등 여기저기 산책을 하면서 저녁을 먹을 식당 몇 군데도 찾아봤다. 확실히 큰 도시는 선택지도 많아진다.


순례길에서 식당을 정할 때는 왠만하면 순례자메뉴가 있는 곳을 가게 된다. 순례자메뉴(Menu del peregrino)는 순례자들을 위한 일종의 세트메뉴라 볼 수 있는데, 전식-본식-후식에 보통 물/와인이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이런 구성은 순례길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스페인에서는 메뉴델디아(Menu del dia), 즉 오늘의 메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전역의 꽤 많은 식당에서 볼 수 있다. 우리로 치면 그날그날 메뉴가 바뀌는 백반집같은 느낌이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메뉴델디아의 시작은 스페인의 독재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후 프랑코가 권력을 갖게 되면서 민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한 정책 몇 가지(축구, 복권 등)를 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메뉴델디아이다.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예전에는 식당에서 의무적으로 판매해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제도가 폐지된지 오래지만, 여전히 스페인의 식당에 가면 메뉴델디아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메인메뉴 한 접시 정도의 가격으로 전식/후식과 음료까지 제공해주니 외식을 할 때 가격부담이 덜하게 되는 고마운 존재인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메뉴델디아(오늘의메뉴)가 순례길에서 이름만 조금 바뀌어 순례자메뉴로 순례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차이점은 보통의 메뉴델디아는 주로 점심메뉴라는 느낌이 강한데, 순례길에서는 저녁에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저녁에 메뉴델디아를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고, 점심에만 순례자메뉴가 가능한 식당들도 있었지만) 그리고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순례자 메뉴가 확실히 양이 좀 더 많아보인다.


이 먼 곳까지 왔으니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을 빼놓을 순 없다. 어쩌면 맛있는걸 먹기 위해 하루종일 열심히 걷는건지도 모르겠다. 구글링과 동네산책을 통해 추린 몇 군데 식당 중에 가격도 괜찮으면서 한국인들의 리뷰가 좋은 한 곳을 정했다. 오늘도 어제 같이 저녁을 먹었던 순례자들과 동행을 했다.


보통 순례자메뉴(혹은 오늘의메뉴)를 주문할 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기 마련이다. 전식/본식/후식까지 보통은 너댓가지 종류가 있고 그 중에 내가 먹고 싶은걸 고르면 된다. 전식은 샐러드나 수프같은 가벼운 요리가 대부분이나 가끔 파스타 종류도 전식으로 선택할 수 있다. 참고로 배고프거나 많이 먹고 싶을때는 전식에서 파스타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순례길에서 파스타를 주문하면 여자 기준으로는 두끼에 나눠 먹어도 될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이 나오는걸 많이 봤기 때문이다. 거의 탑을 쌓아주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여러가지 중에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식당엘 가도 내 취향에 가까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장점이겠다.


전식으로 리조또를 선택했다. 유럽은 우리하고는 쌀을 익히는 방식이 좀 다르다보니 빠에야나 리조또 같이 쌀이 들어가는 음식을 먹어보면 우리 기준에서는 쌀이 덜 익었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파스타의 알텐데(Al-dente) 느낌으로 쌀을 익힌거라 보면 된다. 그렇다보니 유럽의 식당에서 은근히 실패를 많이하는 음식이 리조또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청 쌀이 먹고 싶은때 아니면 주문을 잘 안하는 편인데(전식으로 먹기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식당 사장님의 강력한 추천을 거절할 수 없어 주문해봤다. 적당히 크리미 하면서 적당히 간간하면서 쌀도 한국인이 먹기 괜찮을만큼 푹 잘 익어 정말 맛있게 먹었다. 유럽에서 먹은 리조또 중에 손꼽을 만큼 맛있는 리조또였다. 같이 간 일행들도 모두 맛있다며 맛집인것같다고 좋아했다. 우리에게 적극 추천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지는 순간이다.


오늘 선택한 메인메뉴는 돼지고기. 어제 양을 먹었으니 오늘은 돼지로 가주면 되겠다.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이베리코(돼지고기)의 나라에 왔으니까. 얇게 구운 돼지고기에 감자, 파프리카, 샐러드채소 등이 같이 예쁜 한 접시가 나왔다. 구워진 돼지고기에는 생파슬리를 넣은 올리브오일 소스가 얹어져있었다. 주로 오징어과 해산물에 생파슬리가 들어간 오일소스가 곁들여지는걸 많이 봤는데, 돼지고기랑도 잘 어울렸다. 이미 배가 빵빵해졌지만 디저트를 생략하는건 예의가 아니지. 나는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사실 이번 일정에서 이왕 스페인 북부지방에 온거 원조 바스크치즈케이크를 먹으러 다녀오고 싶었는데, 산세바스티안까지 생각보다 동선이 좋지 않아 포기했고 그대신 보이는 족족 스페인의 치즈케이크를 먹어보고 있는 중이다. 배는 부르지만 동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 안주 삼아 먹다보니 디저트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처음부터 엄청 친절했던 식당 사장님은 마지막에 커피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셨다. 디저트를 포함 모든 식사를 끝내고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모금은 맛있고 즐거웠던 식사의 딱 적당한 마침표 같은 느낌이다. 하루에 20-30킬로씩 걷는 일상에서는 밤에 카페인 좀 몸에 들어간다고 잠을 못 잘 일도 없다.


순례길에 순례자메뉴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일단 매일 전식-본식-후식에 와인까지 주문해서 저녁식사를 하기엔 부담이 됐을것 같다. 스페인 음식은 참 다양하고 매력있는데, 다양한 순례자메뉴들을 먹어보다 보면 스페인 식문화를 꽤 다양하게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일부러 식도락 여행을 오기도 하는데, 순례길을 걸으며 다양한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면 1석2조가 아닐까. 더불어 맛있는 음식에 와인 한 잔 곁들이며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하루의 일과를 나누는 시간 자체도 참 소중하고 행복했다. 그 날의 순례길을 마무리하기에 순례자 메뉴만큼 좋은 것이 없다. 물론 혼자 가고 순례자 메뉴를 주문할 수 있으니 혼자일 때도 순례자메뉴는 소중하다. 순례자길에 순례자메뉴가 없었더라면 순례길은 여러가지로 덜 풍요로웠을 것 같다.



*식당에서 유용한 스페인어 배워가기

- 순례자메뉴 : Menu del peregrino (메누 델 페레그리노)

- 돼지고기 : cerdo

- 항정살 : secreto

- 와인 : vino

- 물 : agua

- 쌀 : arroz (메뉴에 리조또나 빠에야가 아니더라도 이 단어가 들어있다면 쌀이 나오는 음식이니 참고하자. 단, 쌀이 어떻게 조리되어 나올지는 음식에 따라 다를 수 있음)




* 추천식당

NK-Cuipuzcoa Restaurante-Bar

순례자메뉴: 15유로 (2023년 12월 기준)


https://maps.app.goo.gl/9zHhiFNKW48NZTug8




KakaoTalk_20240419_171015152.jpg 전 날 비로 땅은 젖어 있었다.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2.jpg 조금씩 날이 개어가고.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3.jpg 겨울이지만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4.jpg 산티아고길 사진으로 가장 많이 봤던 이 곳.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5.jpg 산토도밍고로 가는 길목은 지루한줄 모르고 걸었던 것 같다.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6.jpg 겨울의 푸르름.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7.jpg 내일은 좀 더 파란하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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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녁식사.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9.jpg 정말 맛있게 먹은 리조또.
KakaoTalk_20240419_171015152_08.jpg Secreto iberico. 이베리코 항정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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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로 먹은 치즈케이크와 마지막에 서비스로 내어주신 에스프레소(Cafe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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