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순례길 (02) 순례길 첫 날,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7시 반쯤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울 스페인에서는 아직 해가 뜨기 전 어둑할 시간이다. 밖엘 나와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예보가 없었던 건 아닌데, 빗소리가 안 들리길래 괜찮나 보다 했다. 알베르게 문은 이미 닫혀서(유럽의 현관은 대부분 한번 닫으면 안에서 자동으로 잠기는 시스템) 다시 들어갈 수 없고, 다행히 알베르게랑 붙어있는 성당 문이 열려있길래 들어가 한 켠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고, 들어간 김에 촛불도 하나 밝혔다. 별 탈 없이 산티아고에 입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겨울의 까미노는 비 오는 날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이렇게 비가 내리다니. 그리고 그 와중에 비에 젖어있는 로그로뇨 구시가 골목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이런저런 많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일단 서둘러 출발했다. 첫날인데, 30km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다. 로그로뇨를 빠져나가는 내내 비는 계속 내렸고, 우산을 쓰고 도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아마도 출근길이겠지)을 가로지르며 나는 우비를 입은 채 도심을 빠져나갔다.
로그로뇨에서 출발해 나바레떼, 벤토사를 거쳐 나헤라까지 30km 구간은 전체 프랑스길을 놓고 봤을 때는 무난한 구간이었다. 단지 내게는 겨울까미노를 시작한 첫날이었고, 중간중간 비가 꽤 왔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이었다. 보통 생장에서 프랑스길을 시작할 때 피레네를 넘는 첫날 순례자들은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생각보다 험난한(?) 산을 넘는데 당황하고, 그 와중에 바윗덩어리를 이고 가는 것 같은 배낭의 무게감에 힘들고, 앞으로 한 달여 시간을 어떻게 건너 싶고. 피레네를 걷던 첫 날 만큼은 아니었지만 겨울까미노 첫날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가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비바람 사이를 걸으며 문득 한여름 쨍쨍한 까미노가 그리워졌고, 상대적으로 여름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겨울의 배낭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앞으로 남은 한 달을 이렇게 비바람 속에서 걸어야 하나 암담했었다고나 할까. 굳이 왜 이 겨울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특히, 20km 정도 지점이었던 벤토사에 도착했을 때 특히 비바람이 세기도 했고, 이쯤에서 오늘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벤토사엔 겨울에 문을 여는 숙박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나헤라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아마 벤토사에 문을 연 알베르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는 나헤라까지 갔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헤라에서의 저녁식사를 메뉴를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양고기가 유명한 가성비 좋은 식당이 있다고 하니 순례길 첫날 저녁식사로 딱이다.
첫날부터 비바람에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하루종일 쉬지 않고 비가 온 것은 아니다. 로그로뇨를 빠져나올 때는 추적추적 가을비 같은 비가 내렸고, 나바레떼로 가는 길에 그 비는 그쳤다. 벤토사에 도착했을 때는 비바람이 너무 세서 힘들었는데, 나헤라에 거의 다 왔을쯤엔 무지개가 빼꼼 얼굴을 내밀어 고생한 하루에 대한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겨울 까미노는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걸 첫날에 웬만큼 경험한 것 같다. 겨울 까미노도 의외로 매력 있는 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헤라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샤워와 세탁 등을 한 뒤에 좀 쉬다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같은 알베르게에 머무는 한국인 순례자 두 명이 동행했다. 식당은 알베르게에서 많이 멀지 않았으며 전식, 본식, 후식에 물과 와인이 포함된 순례자메뉴를 13.5유로에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전식, 본식, 후식에 빵과 음료를 포함하는 메뉴는 사실 순례길 뿐 아니라 스페인 전역에서 볼 수 있다.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해석하면 오늘의 메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메뉴 델 디아가 순례길에서 순례자메뉴(Menu de pergrino)로 불리는 것인데, 메뉴 델 디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해보기로 하자. 오늘은 일단 많이 걸었으니 양고기를 먹는데 좀 더 집중하고 싶다.
메인메뉴는 양고기가 전부가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등 다양하게 있었다. 양은 다른 고기에 비해서 한국인에게는 덜 흔한 고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우리 모두 통일(?)해서 양고기를 주문했고, 전식은 다른 걸 주문했던 것 같다. 나는 마늘 수프(Sopa de Ajo)가 있길래 그걸 주문했다. 스페인 음식이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큰 이유 중 하나가 마늘을 많이 쓴다는 것. 여담이지만 빤꼰토마테라고 하는 아침에 먹는 토마토토스트에도 마늘이 들어가고, 여름에 남쪽에서 많이 먹는 토마토 냉수프인 가스파초에도 마늘이 빠져서는 안 된다. 아무튼 마늘 베이스에 수란이 동동 띄워져 있던 따끈한 마늘 수프는 비바람 속에 걸었던 내 몸을 충분히 녹여주었다.
양고기는 북쪽보다는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많이 먹는다고 생각했다. 이슬람 문화가 상대적으로 북쪽보다는 많이 남아있고, 또 모로코 이주민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순례길을 걸으며 보니 북쪽에서 양고기를 안 먹을 이유가 없겠더라. 순례길 후반부인 갈리시아 지방을 걸을 때 얼마나 많은 양 떼들을 봤는지!
참고로 양고기는 스페인어로 꼬르데로(Cordero)라고 한다. 요즘에야 워낙 번역기가 잘 되어있긴 하지만 어렵지 않은 단어이니 양고기를 좋아한다면 외우거나 메모해 두면 분명히 유용하게 써먹을 데가 있을 것이다. 스페인은 우리나라 보다 양고기를 흔하게 먹기 때문에 양고기 전문점이 아니라 하더라도 양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많고, 맛도 대체적으로 괜찮다. 주로 갈비 부위를 구워서 주는 곳이 많은데 꼬스띠야 데 꼬르데로(Costilla de Cordero)라 쓰여 있는 걸 본다면 양갈비이니 꼭 시도해 보기를.
본식까지 다 먹었으니 마지막으로 디저트 타임. 나는 플랑이라는 스페인식 푸딩을 주문했다. 스페인식 플랑은 딱히 좋아하는 디저트는 아닌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외국에서 못 보던 한국음식을 보면 반가운 그런 마음과 비슷했던 것 같다. 마늘 수프에 양고기, 와인, 플랑까지. 순례길 첫날부터 제대로 순례자메뉴를 먹었다. 알베르게에 돌아와 자기 전 오늘 하루를 정리하다 보니 참 긴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걷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누군가의 부엔까미노라는 인사는 더 힘이 되었고, 비바람 속을 걷는 사이사이 보였던 햇볕과 맑은 순간들은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 긴 하루의 마지막에 맛있는 저녁을 먹었으니 이 든든함 마음을 갖고, 내일은 좀 더 힘을 내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 식당에서 유용한 스페인어 배워가기
- 양고기: Cordero(꼬르데로)
- 갈비: Costilla(꼬스띠야)
- 양갈비: Costilla de cordero (꼬스띠야 데 꼬르데로)
- 돼지갈비: Costilla de cerdo (꼬스띠야 데 세르도)
*추천식당
- Meson El Buen Yantar, Najera
순례자 메뉴: 13.5유로 (2023년 12월 기준)
https://maps.app.goo.gl/xD4xPuugh25qemmA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