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TI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by 방구석여행자

저는 CTI엔지니어입니다. 아, 이제는 였었다고 해야 할까요? 경력은 N연차.

처음부터 CTI엔지니어가 꿈이었느냐 하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CTI가 뭔지도 몰랐을뿐더러, CTI엔지니어라는 직업은 더더욱 생소했었으니까요. 저는 원래 서버 관리자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단지 회사 채용 모집 공고에 있는 <서버 관리>라는 키워드만 보고 첫 회사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엔 몰랐었죠. 그게 바로 콜센터 설루션을 개발 및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는 회사였다는 걸. 저는 면접 때 서버 명령어에 대해 물어보길래 아무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면접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빨리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저는 출근 준비를 했었습니다. 당장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더 이상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었던 나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출근을 하고 보니 알게 된 회사의 실체. 학원에서 배웠던 리눅스 서버 명령어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던져진 콜센터 업무 매뉴얼과 설루션 영문매뉴얼.


CTI는 미들웨어이기 때문에 모든 설루션과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연관이 있는 설루션에 대해 겉핥기식으로라도 다 알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콜센터의 업무 흐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선배들의 잔소리, 너도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잔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CTI설루션이 외산 설루션이었기에 매뉴얼은 영문매뉴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연히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냥 한국어 매뉴얼이었더라도 기술적인 용어들이라 이해하기 힘들었을 텐데 영문 매뉴얼이 웬 말이냐. 이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모니터에 매뉴얼을 띄워놓고 허송세월을 보냈던 나는 점차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시간 때우기 용인 것 같았습니다. 처음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의 나의 마음가짐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나와 함께 들어왔던 동기들은 사수와 짝을 이뤄 점차 실무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내 사수는 어디 갔지?'


나도 일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내 사수는 나를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점점 성장하는데 나만 가만히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사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다른 동기 친구들은 현장 경험을 통해 성장을 하고 있는데 저는 언제쯤 현장 경험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저도 좀 데리고 다녀주세요."


"xx 씨, 영문 매뉴얼은 다 읽어봤어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다 못 읽어봤지. 그걸 말이라고.' 프로세스가 몇 개고, 각 프로세스마다 영문매뉴얼이 기본 1000장 정도 되는데 그걸 언제 다 읽고 있겠는가. 게다가 모르는 용어 투성이라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아마 알 것입니다. 모르는 채로 모르는걸 계속 반복해서 봐도 더 모른다는 것을요. 그러나 사수는 영문매뉴얼부터 읽어봐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었습니다. 나는 사수 본인에게 묻고 싶었지요. 본인은 처음에 영문매뉴얼을 다 읽어 보셨는지?


결국 나의 사수를 향한 어필과 사수와 함께 날개 돋친 듯 잘 나가는 나의 동기들을 보신 임원진들이 내 사수에게 "xx얘도 좀 끌고 나가서 현장 경험해보라고 해"라는 압박에 내 사수는 반강제로 나와 함께 몇 개의 사이트를 방문했고, 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참 대충 가르쳐 주는 것 같았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사무실에 앉아 읽기 힘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영문매뉴얼을 멍 때리고 앉아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 적어도 나았었습니다. 그리고 내 첫 사수는 나를 본인이 감당하기 어렵다며, 다른 선배에게 업무를 배우라고 나를 다른 선배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싫다고 헌신짝처럼 보내버려도 되는 거냐? 진짜 아무리 혼자 일하는 게 좋다한들,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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