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선배를 만났다

by 방구석여행자

나의 첫 사수는 나를 가르칠 능력이 본인에게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마침 한 선배가 내게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영문매뉴얼이 지겨웠던 찰나 그 선배를 돕기로 결심하며 그 선배가 시키는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해"


다른 동기들은 다른 선배들에게 일을 배우며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그에게도 나라는 카드밖에 없었고, 첫 사수에게 버림받은 나 역시도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후배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일을 배우고 싶은 선배가 필요했다. 우리 둘은 서로 필요한 게 같았고, 함께 있으면 윈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나의 두 번째 사수가 생긴 것이었다. 그에게 일을 배우면 '나도 다른 동기들처럼 잘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설렜다. 그가 얼마나 최악인지 알지 못한 채.


그때부터 그는 내게 무조건적인 야근을 강요를 했었다. 내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퇴근을 준비하자, "할 일 없다고 퇴근하는 거야? 일을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안 되어있네"라는 말로 나를 가둬두었다. 요즘 말로 하면 가스 라이팅 정도. 입사한 지 갓 3-4개월 정도였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영문매뉴얼을 보는 것 말고는 뭘 해야 할지 몰랐었다. "뭘 해야 될까요?"라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본인 일에 치여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와 일을 하며 프로세스 설치, 설정, 전화기 설치, 전화기 기능 등을 테스트하며 콜센터의 흐름을 익혔다. 그렇게 프로젝트 들어가기 전 그와 만반의 준비를 마쳤고, 그와 함께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자 그는 더 바빠졌고, 나는 멀뚱멀뚱 앉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뭘 해야 될지 몰라 여쭤보면, "xx 씨, 내가 아직도 뭘 해야 할지 알려줘야 돼? 알아서 좀 할 수 없는 거야?"라는 말로 무안 주기 일쑤였다. 처참하고 속상했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일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런 창피함을 당해야 되는 건가 싶었고, 이 악물고 버티면서 참았다.


그러나 참기 힘든 일이 한번 있었다. 문서 작성을 완료해야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 전날이기도 했었다. 그 선배도 다음날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작성하라고 했던 범위까지 문서를 작성했던 나는 퇴근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시간, 야심한 밤이었다. 갑자기 그는 나를 불러 세웠다.


"xx 씨, 어디가?"

"저 말씀하신 범위까지 문서 작성 완료돼서 먼저 들어가 보려고요"

그는 쓱 한번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만들고 가려고 했어? 앉아"


내게 앉으라고 했지만, 내가 작성한 문서에 대한 수정은 본인이 했다. 나는 할 일없이 그가 수정하고 있는 문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생일 전날부터 생일날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회사에서 생일을 맞았었다. 최악의 선배와 함께. 그는 생일날 오전 일과 시간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나서야 다른 분들께 양해를 구해 나를 집에 일찍 보내주었다. 나를 일찍 보내주면서도 본인은 업무시간 끝까지 일을 한다면서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었던 그였다.


이때 만났던 최악의 선배와는 이 프로젝트를 끝으로 더 이상 함께 일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가 맞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도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고, 나도 그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 최악의 선배는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뒀었다. 이 선배를 본보기로 나는 내가 경력이 쌓여 후배를 만나게 되면 '이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 후배들이 좋아하고, 인정하는 선배가 되어야지'라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였고, 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후배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어떤 선배냐고 종종 물어볼 때가 있다. 돌아오는 대답으로는 정말 좋은 선배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일지, 진심일지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알 길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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