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은 결코 티끌이 될 수 없어

by 온정

얼마 전 떤 시험을 보게 되어, 시험 3주 전부터 초조한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에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사실 내게 시험은 트라우마 수준으로 두려운 존재이다. 오죽하면 고등학생 때 시험 기간마다 매일 가위를 눌렸는데, 그 와중에도 ‘귀신님, 절 괴롭혀도 좋으니 제발 내일 보는 시험 답 좀 알려주세요.’라며 속으로 빌곤 했었다.

나에게는 고질병 n종 세트가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되고도 강력한 것은 바로 불안증이다. 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도 막히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손톱 옆 살을 뜯는 걸 보면 한치도 의심할 겨를이 없다. 이는 시기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면 증세가 눈에 띄게 심해진다. 규모가 큰 시험이든, 작은 시험이든, 중요한 시험이든, 그렇지 않든, 재시험을 볼 수 있든,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든, 어떤 시험이든 가리지 않는다. 나의 불안증은 학창 시절의 여러 시험들 때문에 시작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대학원을 졸업한 뒤로 “다시는 시험 같은 거 보지 않을 거야!!” 라며 일명 <시험 해방 선언>을 외쳤으나, 그것은 그저 희망에 불과했다.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도 시험을 봐야 할 일은 종종 생겼다. 하다못해 영어 점수가 없으면 어디 가서 이력서 내기도 어려운 세상이니 말이다. 덕분에 시험을 앞둘 때마다 나는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은 종종 말하곤 한다. 자신이 우주에 있다고 상상해본다면, 내가 겪는 고충들이 아주 티끌만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혹은 100살의 눈으로 현재의 역경을 바라본다면, 그만큼이나 내 감정을 쏟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나도 머리로는 어느 정도 계산해볼 수 있다. 시험지는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하나의 종이 쪼가리에 불가하며, 시험 점수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내 인생을 길게 보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 혹은, 시험을 못 봤다면 다시 보면 되니 그저 최선을 다해 공부하면 된다는 사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방면에서 상상해보아도, 결국 나는 시험을 티끌만 한 존재로 여길 수 없다. 그래, 뭐 이별하며 겪는 슬픔이라든지 친구들과의 다툼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든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속상함이라든지 직장에서 겪는 씁쓸함 같은 경우라면 내가 100살쯤 되었을 때 “인생이 다 그런 법이지 뭐. 하하하” 웃으며 회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시험이란 암만 생각해보아도 가볍고 작은 존재가 될 수 없다. 만일 100살이 된다면 나는 분명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시험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는지... 하지만 만일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시험지를 갖다 놓는다고 해도 나는 마찬가지로 두려울 거야. ”

시험에 이토록 집착하고 좋은 점수를 얻었을 때도 나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내 인생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 트라우마는 오래도록 벗어나기 어렵겠다는 것을, 오랜만에 맞이한 이번 시험을 준비하며 다시 한번 느꼈다. 서른이 넘어서도 학창 시절에 시작된 시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시험이 끝난 뒤에도 나는 매일 밤 시험 보는 꿈을 꾸고 있다.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아직 진행 중이다. 참나.

이게 다 학창 시절에 시도 때도 없이 보았던 쪽지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수학능력시험 때문이다. 아니, 모두가 동일하게 그 시험들을 보았는데 트라우마씩이나 생긴 것을 보면 나의 지나친 욕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대한민국에 나와 같은 사람이 너무 많지는 않기를 바라본다. 요즘 세상의 교육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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