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딱 한 번 마틸다 머리를 도전했던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언제나 긴 머리를 고수해왔다. 그나마 2년에 한 번 꼴로 머리를 자르곤 하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관리를 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하여 머릿결이 빗자루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올해 봄이 찾아왔을 때쯤 점점 빗질조차 안 되는 나의 머리카락을 보며 때가 왔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나는 미용실 가는 일을 계속 미루었다. 귀찮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지금 머리가 딱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도 여름이 다소 급하게 찾아와 버렸다. 긴 머리를 감고 말릴 때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가위로 댕강 잘라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직접 머리칼을 자르는 상상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재미있는 발상이 떠오른 나는 친한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재미 삼아 제 머리 잘라보지 않을래요?”
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지루해진 이 일상에 왠지 대책 없는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었더랬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 듯싶더니 금세 오케이를 외쳤다. 그저 소꿉놀이하듯 놀아보자는 의미였는데, 의외로 그녀는 친구들의 머리를 잘라준 경험이 있다며 자신했다. 2차로 미용실에 갈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며칠 뒤 그녀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손에 일반 가위와 숱가위까지 들려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막 잘라도 돼?”라고 물어보는 그녀에게, 나는 언니의 꿈을 맘껏 펼치라고 답했다. 베란다에 나무 의자를 놓고 그 앞에는 전신 거울을 세웠다. 마침 옆에는 강아지 배변패드가 대량으로 들어있는 큼직한 비닐이 있었는데, 언니는 그 비닐을 빼내서는 목부분과 팔부분을 가위로 뚫어주었다. 비닐을 뒤집어쓴 채 팔을 어떻게 빼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자니 그녀가 손수 내 양쪽 팔을 빼주었다. 비닐 옷을 입은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우리 둘은 한참을 웃었다. 나름 갖출 건 다 갖춘 1일 미용실이었다.
미용실 가는 것을 조금 불편해하는 나로서는, 창문 너머 울창한 나무들을 보며 머리를 자른다는 것부터가 일단 기분이 좋았다. 친구에게 내 머리카락을 맡긴다는 불안감 따위는 신기할 정도로 없었다. 학창 시절 두발 검사를 앞두고 친구들 머리를 잘라주던 실력으로,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싹둑, 과감하게 잘라버렸다. 후두둑. 의자 뒤에 깔아놓은 박스 위로 머리카락 뭉텅이가 떨어지는 두터운 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 상상으로만 행하던 일을 그녀가 대신해주니, 순간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아직 양쪽이 짝짝이였지만 산뜻해진 내 머리가 벌써부터 마음에 들었다.
우리를 향해 내리쬐는 햇빛 탓에 땀이 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내 머리를 손질해주었다. 극도로 상하여 잘 빗기지도 않는 나의 머리를 빗어가며 그녀는 이게 진정 머리카락이 맞냐고 연신 묻기도 하였다. 내가 민망해하며 웃는 사이 그녀는 금방 다시 집중해서 나의 머리를 다듬었다. 양쪽의 길이를 맞추고, 사각사각 숱도 쳐주고, 머리카락의 끝부분도 삐죽삐죽 잘라주면서. 미용실에서 보았던 많은 스킬들을 그녀는 구사하고 있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미용실 손님 10년이면 머리 자르는 것도 가능한 거였냐며 우리는 또 깔깔거리고 웃었다. 머리를 감고, 마지막으로 조금 더 다듬고 난 뒤에야 우리의 1일 미용실 놀이는 끝이 났다.
그렇게 ‘집에서 머리 자르기’는 우리 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무턱대고 부탁했던 일이었기에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었고, 그랬기에 더욱 스릴 있고 재미있었으며 또한 만족스러웠다. 미용실에 찾아갔다면 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동안 그리 큰 감흥은 없었으리라.
피곤할 정도로 신중한 성격을 가진 탓에, 무언가를 결정할 때마다 나는 종종 갑갑해지곤 한다. 그럴 때면 가끔 체면일랑 어딘가로 던져버리고 다짜고짜 행동에 옮겨버리는 것이 갑갑한 마음을 푸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인생이 지루하고 팍팍하다면 일단 시시콜콜하면서도 엉뚱한, 대책 없고도 속 시원한 일을 눈 딱 감고 저질러보자. 치렁치렁 성가시던 머리칼을 댕강 잘라버리듯, 무거웠던 나 자신이 한껏 신선한 사람이 된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이토록 소소한 일상들에 의해 인생은 한층 더 유쾌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