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감기에 몸이 좋지 않았다. 저녁 시간은 훌쩍 지났는데 집에 먹을 게 없었다. 라면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 하는 수 없이 서랍 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냄비 안에서 스프를 머금은 물이 바글바글 끓자 주황색 공기방울이 퐁글퐁글 터졌다. 그 위로 네모난 면을 투척하고는 잘 잠기도록 꾹꾹 눌렀다.
그때 부동산 아줌니께 전화가 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지금 집 보러 가도 되냐’고 물으셨다. 순간, 이미 끓여놓은 라면을 덮어두고 집 전체를 청소한 다음 그들을 맞이하고 다시 보낸 뒤에 국물도 남지 않은 불어 터진 면발을 먹는 나 자신을 상상했다. 웬만하면 오셔도 된다고 대답하겠다만. 집 보여준다고 밥까지 못 먹어야 하나, 싶어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지금 막 밥을 차려서요...” 뒤이어, 죄송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째, 이 아줌니께서는 내가 집을 못 보여드린다고 대답할 때마다 항상 말투가 싸늘해진다. 사정을 얘기했음에도 “그럼 (손님한테) 안된다고 말해요?”라고 되물으며 나를 난감하게 만들기 일쑤이다.“네... 지금은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라고 다시 답하니 아줌니는 알겠다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아, 그때 내가 끓이던 라면 봉지에는 “2분 Okay”라고 적혀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이미 조리가 완료되어 면이 모두 풀려있었다. 식탁 위에 냄비받침을 올리고 그 위에 라면을 냄비째 올렸다. 김치를 꺼내고 앞접시와 수저도 놓았다. 그리곤 앞접시에 라면을 옮겨 담는데, 속에서 울컥, 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거절한 일이니 잊어버리면 될 것을. 라면 한 젓가락을 입에 가져갈 때마다 목구멍이 켁, 막히는 듯했다. 젓가락질을 멈추고 라면 냄비를 바라보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손님이 아직 계시다면 집 보러 오셔도 된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런 바보.
남은 라면을 정리하다가 한 달 전쯤을 떠올렸다. 시댁에 놀러가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도 아줌니께서 똑같은 전화를 거셨다. “제가 오늘은 밖에 나와있어서요.” 그날도 나는 죄송하다 덧붙였다. 그러자 아줌니께서는 “아, 주말에 손님 많은데...” 라면서, “그래서, 안된다고요?”라고 다시 한번 물으셨다. 그날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자꾸만 그 가시 돋친 말투가 떠올랐다. 즐거운 하루를 전화 한 통으로 망쳐버려서 속상했던 기억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네.라고 생각할 즈음에 문자 답장이 왔다.
<가셨고, 내일 7시 예약 가능한가요?>
그렇게 하시라며 답장을 했다. 그리고 뚱뚱해진 라면 면발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으며 난 혼자 분노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내 집에서 라면 한 그릇도 편하게 못 먹나!!!!”
이윽고 그녀를 향한 분노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으로 이어졌다.
이 정도 거절도 이렇게 힘들어해서야, 이 정도 말투에 이렇게 마음이 쓰여서야.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게 없다 나는 참. 불어 터진 라면 면발처럼, 내 속도 터진다 참.
남편이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묻는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별 일 없었어?”
난 대답한다.
“응. 별 일 없었어. 정말 별 일은 없었는데, 근데....”
소심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간다. 별 일 없지만 별 일 있는 것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그 흔적을 좇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