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의 전성기일지라도

by 온정

돌이켜보면 최근 나에게 전성기라고 할만한 시간들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가 아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도전을 한 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복권을 사놓고 당첨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들처럼.
'음, 이게 당첨되면 일단 부동산부터 가야겠다. 그렇게 건물주가 되는 건가? 건물주가 되고 나면 매달 월세가 들어오겠네. 그럼 돈 걱정 없이 놀고 글 쓰면서 살면 되겠군. 아, 덜컥 샀는데 건물값이 떨어져 버리면 어쩌지? 부동산 공부부터 열심히 해야겠군. 하하.'
머릿속에서는 항상 이렇게 아주 머언 길까지 마중을 나간다. 그래 놓고는 결국 동전으로 북북 긁었을 때 ‘꽝!’이 나오면, 멀어지는 복권 당첨의 뒷모습만 처량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이나마 이미 머릿속에서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복권에 당첨되어도 막상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하여간 상상 속에서는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마냥 들뜬다. ‘혹시’라는 태풍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몇 달 전 나는 평소 동경하던 회사의 1차 면접에 합격을 했다. 그곳은 독일계 회사였는데, 나는 작년 독일 여행을 하다가 그 회사의 광고판을 발견하고는 “우와, 저런 곳에 다니면 어떤 기분일까?”라고 말하기도 했더랬다. 그런 회사에 헤드헌터의 제안을 받고 지원해서는 서류 합격, 1차 면접 합격까지. 2차 면접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는 또 합격이라는 친구를 만나러 먼 길로 마중을 나갔다. 그뿐이랴. 처음 취업준비를 하던 5년 전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때도 판교로 면접을 보러 갔었지... 그 회사도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인데. 거길 갔다면 내 경력이 완전히 달라졌겠지? 그때 면접 정말 잘 봤는데 도대체 왜 탈락했던 걸까. 어쨌든 판교로 출근하는 내 꿈은 이제야 이뤄지는 건가. 하하. 아니, 또 생각이 어디까지 간 거야. 빨리 2차 면접 준비해야지.
뭐, 그러니까 생각의 미끄럼틀은 이런 식으로 가속도를 내며 빠르게 흘러가곤 했다. 직장에 환상을 가지기에는 이미 사회생활에 데이고 너덜너덜해진 나였지만. 그리고 아무리 이름 좋은 기업에 들어갈지언정 회사는 모두 흙탕물일 뿐이라는 현실을 잘 알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간만에 설레었다. 간접적인 경험들일 뿐 정작 나는 좋은 곳에 속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무려 이곳의 면접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전성기 구름의 어딘가에 탑승해있었더랬다.

원고를 투고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 신혼여행기를 투고할 때, 나의 글을 출판사에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온몸의 신경세포가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될 확률보다 안 될 확률이 더 크겠지 생각하다가도, 막상 서점 문만 열면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곤 했다. 이곳 어딘가에 내 책이 진열되어있는 상상. 아무개씨가 나의 책 표지를 어루만진다. ‘온정’, 처음 보는 작가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내 그 책을 뽑아 들고 그 자리에 서서 페이지를 넘겨본다. 촤르륵. 흐로록. 티리딕. 촥. 책을 덮더니 무심하게 겨드랑이와 갈비뼈 사이 어디쯤 끼우고 다른 책을 또 탐색하러 간다, 와 같은 상상을 하느라 서점에서 나는 종종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저 출판사에 투고를 했을 뿐인데도 서점의 풍경은 이전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엔 타인이 쓴 글을 그저 읽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잘 쓴 글을 볼 때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출판사의 이름들을 눈여겨보기도 하고, 심지어 책의 디자인에까지 관심이 생겼다.
얼마 전에는 일상 에세이 원고를 정리하고 기획서를 작성하여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신혼여행기를 투고한 뒤로 나름 두 번째 경험이라 조금 덤덤해졌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문집 몇 권을 꺼내어 그 출판사의 메일 주소를 알아내고 메일 내용을 적는데, 마음속에 탄산수라도 채운 양 다시 찌릿찌릿해졌다. 무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내가 원고를 들이밀다니.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을 다 하는구랴.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왠지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전성기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결과 메일을 받는 순간 나는 다시 시무룩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지금 당장은 나의 인생이 담겨있는 원고가,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서점 어딘가에 진열되어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 어떤 구체적인 상상도 가능한 시점이니까 말이다.

5개월 동안 내게 영상 편집을 의뢰해온 고객이 드디어 유튜브 채널을 연다고 했을 때, 나는 천만 유튜버의 편집자가 되는 일을 상상했다. 2주 동안 준비해온 영어 시험이 끝난 이후, 나는 예상치 못하게 최고 점수를 받는 상상을 했다. 이런 종류의 상상은 상상이긴 하지만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상상인 셈이다.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상상이 아니라 무언가 행동을 한 뒤 기대에서 오는 상상인 것이다. 그 후 결과가 얼마나 만족스러웠든, 나를 얼마나 좌절하게 만들었든,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의기소침해졌든, 도전하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이미 나는 전성기를 지나왔다.

현실과 상상이 가까워지려는 찰나. 그리하여 상상이 다소 구체적이 되는 순간. 그 순간들 역시 나의 전성기인 셈이다. 이 애매모호하고도 짧은 전성기들을 지나고 지나고 또 지나다 보면 결국 그것들이 모여 또 하나의 길고 굵직한 전성기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X-300으로 찍다.

언젠가는 꽃이 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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