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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Sep 24. 2020

그저, 아침의 문장들

 힘겹게 눈을 뜨다 말고 습관처럼 협탁에 오른손을 뻗었다. 휴대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간밤에 문자가 와있었다. 사실 어제저녁 나는 의뢰인에게 최종 작업물을 보낸 뒤, 답장이 오기를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취침시간인 11시가 되어도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는 밥공기에 반 숟가락 정도 밥을 남긴 것처럼 찜찜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더랬다. 가을이 찾아오며 얼마 전에 바꾼 두터운 이불은 나의 발가락 끝부터 뱃가죽을 지나 목덜미까지 푸근하게 감쌌다. 요 며칠 나를 괴롭히던 피로감을 이불의 감촉에 나누어주며 나는 스르륵 잠에 들었다.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채로 잠든 탓에 밤새 정신없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여러 번 비행기를 탔다. 그 덕에 멀미를 하듯 멀뚱하게 깨어났다.

 문자에는 작업물이 너무 마음에 든다는 내용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어서 혹시 아주 소소한 부분을 수정해주실 수 있냐는 부탁을 받았다. 기분 좋게,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얼굴로 느껴지는 적당히 차가운 공기와- 따듯한 이불이 나를 살며시 누르는 이 기분이 좋아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조금 더 이불속에서 꼼지락대다가, 열 문제짜리 숙제를 아홉 문제만 풀어놓은 듯한 기분이 싫어서 나는 일어났다. 그렇게 바로 컴퓨터 전원을 켜러 서재로 들어갔지만 배가 고파왔다. 사실 언제까지 해달라는 요청은 없었으니 아침식사 정도는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항시 올려놓는, 지름이 한 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프라이팬 위에 기름을 둘렀다. 불을 켜서 팬을 달군 뒤 계란을 깨서 올렸다. 그리고는 팬의 코팅을 손상시키는 게 싫어 뒤집개 대신 나무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터트리고 계란을 살살 뒤집었다. 밥솥에서 밥을 푸고 못생긴 계란 프라이를 올린 채 그 위에 케첩을 아무렇게나 뿌렸다. 본래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는 편이지만, 숙제 한 문제를 남겨두고 있자니 그저 간단하게 배만 채우고 작업을 시작하고 싶었던 탓이다. 그렇게 나무 식탁 위에 밥공기와 젓가락 숟가락만 두고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밥그릇 안으로 숟가락을 깊게 집어넣으면 케첩이 묻은 계란 조각과 밥알들이 한 숟가락에 뭉쳐져 나왔다.

“음... 맛있다.”

 아무런 반찬도 없이 계란 프라이에 밥만 먹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문득 결혼  부모님이 2주일 동안 집을 비우셨던 날이 떠올랐다. 당시 요리라곤 전혀   몰랐던 나는 2주일 내내 계란을 부쳤다. 계란과 두부만 있으면 평생도 먹고살  있다고 떵떵거리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계란에서 비린내라는  느꼈다. 아무리 맛있는 계란이라도 매일 계란에 밥만 먹고 있자니 나중에는 아주 이골이 났다. 그때 엄마에게 느꼈던 고마움과 죄송한 감정들을 오늘 아침밥을 먹다가 오랜만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제 계란 프라이에 밥만 먹는 일은 연례 행사일정도로 나는  야무지게 차려먹는 딸이 되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는 그때보다 조금은 성장했구나, 생각하며 밥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제야 컴퓨터를 켰고 작업은 고작 30분 만에 끝이 났다. 의뢰인은 연거푸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난 숙제를 모두 끝내고 100점 만점의 채점을 받은 학생처럼 후련해졌다. 이걸 끝내면 저게 나타나고, 저걸 끝내면 또 다른 게 나타나던 지난 며칠을 견뎌 내고 나니, 오늘 나에게는 잠시나마 빈틈이 찾아왔다. 거실로 들어오는 햇빛을 벗 삼아 메모장 위로 글자를 채워나가는 이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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