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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Aug 11. 2019

없으면 큰일 날 줄 알았다.

'의존'이 아닌 '의지'로

"널 만난 뒤로 내 인생은 훨씬 행복해졌어.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니?"

나는 꽤 오랫동안 역류성 식도염을 앓아왔다.


•역류성 식도염: 위의 내용물 또는 위산이 식도로 역류하여 발생하는 식도의 염증 (출처:서울대학교 병원 의학정보)

한방에 크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24시간 내내 누군가가 나를 따라다니며 포크로 살살살 찌르듯, 이 병은 종일 나를 괴롭혔다.
항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자기 5시간 전에 밥을 먹어도 누울 때면 산이 역류해오곤 했다. 목에 항상 이물감을 달고 살고, 겨울이 되면 약해진 식도 때문에 밤새 기침을 했다. 툭하면 가슴이 탈 듯이 쓰렸다. 민망하게 자꾸 사람들 앞에서 트림이 나오기도 했다.

낫기 위해 몇 년간 별 짓을 다해보았다. 순한 음식 위주로 식단 조절하기, 병원 투어 다니면서 효과 있는 위장약 찾기, 적당한 운동 찾아서 하기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할 경우 산이 역류를 하기 때문에 '적당히' 해야 하는 것이 포인트. 거기다 세상에 엎드리거나 눕는 운동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엎드리거나 누우면 또 역류하기 때문에 그것도 피해야 한다.), 매 끼니 양배추즙 먹기, 2주 동안 죽만 먹어보기, 외식 하기 등등. 심지어 앉아서 잠을 자는 경우도 허다했다.

매 년 위 내시경을 받았다. 인생이 불행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루하루가 괴로운데, 진단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산이 역류한 흔적이 보이네요. 자극적인 음식 피하시고, 스트레스 많이 안 받는 게 좋아요."
난 역류성 식도염이 평생 내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거라고 확신했다. 병원 이 곳, 저곳에서 처방받아서 약을 먹어도 큰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힘들게 지내던 나는, 우연히 한 위장약 J를 알게 되었다.

맞다.
가장 첫 줄에 나온 두 마디는 바로 그 위장약에게 하는 말이다. 실제로 나는 J을 만난 뒤 내 삶의 질이 달라졌다며, 나 드디어 사람 됐다며 J를 찬양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마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온 듯했다.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던 가슴 쓰림이, 그 약 두 알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마치 마법사의 묘약을 먹은 것처럼.

원래 나는 아파도 최대한 약을 안 먹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앞으로 평생 느끼지 못할 줄만 알았던 '속 편한' 일이 현실이 되게끔 도와준 이 약은 신세계였다.

"이 약만 있다면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어!"

그렇게 나는 약을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속이 불편한 상태에 대한 인내심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쉬운 길, 'J'에 무척 의존하게 되었다.
외출을 했을 때 가방에 J가 없으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J가 없는 일상은 더 이상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내 인생에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J를 장기 복용하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믿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깊게 새기지 않고 넘겨버렸다. 하지만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제산제 장기 복용의 부작용'에 대한 뉴스 기사나 포스팅들을 보았다. 일부러 찾은 것도 아닌데 꼭 눈 앞에 제산제에 관련된 타이틀이 나타나곤 했다. 제산 작용이 있는 약을 장기 복용할 경우, 꼭 필요한 위산조차 억제시켜버려서 저산증으로 소화불량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이 경고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외치는 것 같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바꿔준 J와 멀어져야 한다니.
무엇보다 J를 줄이는 순간 예전 상태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다.
시작도 하기 전인데, 끊으려고 결심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경고를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J를 끊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일단 식탁에 떡하니 올려있던 J를 서랍장 안에 넣었다. 위장에 좋은 차들을 구입하여 J 대신 매일 마셨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나면 J를 찾았었지만, 이제 J가 없다는 가정 하에 식단을 조절했다.

막상 부딪혀보니 J가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버틸만했다. 오히려 왜 그렇게도 J에 의존했었을까, 왜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여겼을까, 조금 후회스러웠다.

J는 나의 역류성 식도염을 심한 수준에서 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 이후는 내 몫이었던 것이다.
평생 J에 의존하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세상에 어디 '평생 의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존재하긴 할까? 언젠가는 이 '의존'을 '의지'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생기고, 유일하게 효과가 있는 약을 발견하여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고, 결국 노력해서 약을 끊은 이야기. 일련의 상황을 경험하며 나는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느껴지는 것, 내가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들이 먼 훗날 내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낭떠러지를 앞에 두고, 살기 위해 낙하산을 부여잡고 있지만, 막상 떨어져 보면 그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혹은 낙하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나는 지금 계약직의 삶을 살고 있다. 앞으로 계속 이 곳에 남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시한부 인생이란, 직접 겪어보니 생각 그 이상으로 괴롭고 두려웠다. 이 정도 장점을 가진 직장을 내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여기서 끝나버리면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계약 만기 1년 전부터 나는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았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던 J처럼, 이 직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히려 낭떠러지에서 내 숨겨진 날개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나의 몫일 것이다.
의존이 아닌 의지로써 말이다.



오늘의 일상,

먹던 약을 끊다가 문득.


커버사진/ 필름카메라 MINOLTA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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