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으로 소설 공모전의 ‘접수’ 버튼을 누르고 왔다.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한 작품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후련함과 뿌듯함이 압도적이다. 공모전 소식을 알게 된 이후로,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써오던 SF 소설에 살을 붙이고,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쳐도 무언가 해결되지 않는 듯한 찝찝함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노력했으나 나에게는 아직 비판적인 읽기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남편이 편집자 역할을 해주었고 그 냉철한 시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처음 그의 피드백을 받은 뒤엔 며칠 동안 잠에 들지 못했을 정도로 크게 좌절했다. 고칠 점이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쓰는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나의 한계를 느꼈다.
며칠간 밤을 지새우며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소설을 다시 쓰기로 했다. 소재만 남긴 채 전혀 다른 스토리를 구상해서 빈 페이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마감까지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내고 싶었다.
다시 쓴 작품은 어느 부분에서는 개선되었으나 어느 부분에서는 오히려 더 부족해졌다. ‘쓰는 것’과 ‘잘 쓰는 것’은 정말 다른 개념이라는 걸 몸소 느꼈다. 비슷한 맥락에서, 창작의 고통은 적었으나 퇴고의 고통은 정말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한국식 교육의 대표적인 산물로써, 시험만 잘 보고 유연한 사고를 할 줄 모르는 나는 창의력과는 거리가 멀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내 안에 꿈틀대는 창의성을 발견하고 종종 놀랐다. 고로 아이디어나 소재는 꽤 많았으나 소설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추거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달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돌아보니 내 삶의 방식 자체가 그랬다. 언제나 숲을 볼 줄 모르고 나무만 볼 줄 알았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책을 많이 읽어야만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도 이번 경험을 통해 많이 깨달았다.
막판에는 부족한 부분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내 소설을 읽는 게 곤욕일 정도였다. 나 따위가 감히 소설에 도전을 하다니, 같은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밀려왔다. 많이 지쳐버린 상태로 매일 꾸역꾸역 고쳤다. 그 덕에 적어도 초고보다는 만족하며 작품을 제출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소설 첫 도전에 무언가를 바라는 것 자체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위대함을 깨닫고 나니 소설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좀 더 머리를 쥐어뜯고 좌절해보아야 그나마 나쁘지 않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이 경험을 통해 한층 성장했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나아진 내 모습을 기대해본다.
내 몫을 못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가득한 요즘. 그래도 새로운 도전으로 내 몫 하나 했다. 조금 느리더라도 쓰는 사람으로서 꾸준히 성장하고 싶다. 작가라고 불릴 때 나는 가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