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가 안 나갈 때마다 괴로워하다가, '그래, 안 되는 거는 일단 좀 묵혀두고뭐라도 다시 써보자.'라는 생각에 다른 소재를 꺼내어 새로운 소설을 썼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또 막히고, 그럼 다시 다른 걸 써보기 시작하고. 하나에 진득하니 매달리지 못한 채 산만한 패턴만반복했다.
핑계를 대자면, 중간중간에 에세이 출간 작업을 하느라 소설 쓰기에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또 최근에 제법 중대한 결정을 내리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어렵게 결정을 내린 뒤로는 머리 식힐 겸 시댁으로 5일 간 휴가도 다녀왔다. 다녀와서는 도통 글쓰기가 손에 잡히지 않아 책만 읽었다. 책을 읽는 건 즐거웠고, 그 자체만으로 즐기면 좋았겠지만,한 편에는 글을 쓰지 않는 나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존재했다. '너, 그것밖에 못해?' 자꾸만 못된 말을 했다. 이렇게 나 자신을 꾸짖다 보면, 나의 감정은 조금씩 조금씩 타들어가다가 끝내 울적함을 지닌 잿더미의 모습으로 남겨져버렸다.
나의 기색을 살피던 남편 홍군이 괜찮냐고 물었다.
"내가 이 상황에 그냥 안주하게 될까 봐, 혹시나 글쓰기가 어렵다고 놓아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요 몇 주동안 글 좀 못썼다고 그런 걱정이 드네."
"온정아. 항상 하는 말이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내가 나 자신한테 좀 엄격하긴 하지?"
"엄격한 정도가 아니라, 가끔 보면 너무 가혹해 보여."
"그 정도인가? 맞아. 맞는 것 같아.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못됐어. 내가 나 자신한테 제일 못되게 굴어, 아주.
그래도... 그래도 그게 날 발전하게 해. 친오빠도 종종 이야기하거든. 불안감이 항상 자신을 힘들게 하지만, 그게 또 자신을 성장하게 한다고. 나도 나를 계속 채찍질하니까 조금씩이나마 발전하고 있는 거겠지."
가만히 듣던 홍군이 말했다.
"음... 요즘 많이 생각하는 건데, 롱런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 천천히, 차근차근, 즐기면서 해보는 게 어떨까?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잖아."
"롱런이라. 롱런... 그러게. 그거 내가 제일 못하는 거네. 그러게 말이야. 글쓰기만큼은 무조건 롱런해야 하는데. 정말로."
홍군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괴롭혀온 걸 지도 모르겠다고. 조금만 가능성이 보이면, 그래, 여기서 더 해야 돼. 멈추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만 털끝만큼이라도 발전해나갈 수 있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되는 거니까, 더 늦게 전에. 얼른, 하나라도 더...
다음 달에는 에세이가 나온다. 출간일이 점점 다가오자,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나는 왠지 불안해졌다. '출판사와의 계약 상태'라는 건 마치 소속감과도 비슷한 안정감을 주었으니까. 출간이 된 뒤로 나는 다시 허허벌판을 떠돌며 작은 돌멩이를 주워 모으는 심정으로 글을 써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전에, 소속감이 있을 때 뭐라도 해두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공모전에 출품이라도 해서, 몇 달 동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나을 텐데. 달력에 적어둔 여러 공모전들의 마감일을 지날 때마다, 나는 내가 게을러서 그 아까운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다음 달에 책이 나오면, 근 14개월 동안 '온정'이라는 이름이 적힌 세 번째 책을 일궈낸 셈이다. 내가 뭐라고,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일들을 해냈다. 나 자신을 칭찬해주어야 마땅하고, 조금 편안하게 마음먹어도 괜찮을 텐데. 나는 또 이렇게 버릇처럼 나를 쥐어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3등을 했다. 그 뒤로 그 가능성을 키워보겠다며 나 자신을 어찌나 괴롭혔는지. 결국 부담감에 짓눌려 성적은 쭉쭉 하락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프다. 그 채찍질로 인해 부어오른 마음이, 피딱지가, 진한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글쓰기만큼은 그런 식으로 더럽혀지게 놔둘 수 없다. 행복의 영역, 그 안에다 고이 넣어두고 소중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니까. 오래도록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절실한 만큼 더 아껴두어야 한다. 가혹한 채찍질과 롱런은 같이 가기 어려운 존재임을 계속해서 생각해야겠다. 오래오래, 즐겁게 함께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