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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Mar 17. 2022

에세이 출간 준비-2교 기록

편집자님의 긴 편지

편집자님께 1교 수정 파일을 넘겨드린 뒤 시간이 흘러 2교 파일을 받게 되었다.

2교는 조판본으로 받게 될 줄 알았는데, 메일을 확인해보니 1교 때와 마찬가지로 한글 파일이 첨부되어있었다. '수정 사항이 많아서 아직 조판에 못 올리셨나?' 생각하며 파일을 열어보니 서두에 세 페이지 가량 편집자님의 편지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가장한 '초보 작가 교육'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집자님은 상세하고 친절하게 몇 가지의 큼직한 수정 의견들을 전해오셨다. 편지에는 혹여나 내가 편집자님의 조언을 보고 상처를 받거나 좌절할까 봐 여러 번 고민하신 흔적이 역력했다. 나의 소심하고 유약한 멘탈을 잘 아셔서 더 그러신 건지, 본래 편집자님의 작업 스타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사려 깊게 이야기해주실 때마다 나의 마음은 감사함을 넘어 감동에 다다르곤 한다.


편지에서 편집자님은 한 가지를 꼭 짚고 넘어가고자 하셨다. 바로 '인용' 부분이었다. 내가 다른 작가님들의 문장을 짧게 인용해서 넣은 글이 몇 개 있었는데, 편집자님은 그 부분을 나의 글로 대체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아래는 편지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온 것이다.


책은 독자에게 건네는 거대한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의 문체와 말투, 개성, 하고자 하는 말 등이 아주 중요하죠. 더군다나 글을 쓴다는 건 방송처럼 직접 나와서 얼굴을 보거나 입술을 보며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오로지 글의 힘으로만 상대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님의 말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다른 작가님들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좀 갸우뚱합니다. 물론 작가님께서 인상적으로 느끼셨던 부분이셨을 테고, 그 말들이 작가님이 글을 쓰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인용이 사용된 부분들을 보면 모두 꼭지의 거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어요.

글의 마지막은 글쓴이의 모든 의도가 마무리되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독자는 처음에 읽었던 부분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만 강렬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그래서 글의 마지막은 작가의 말이 가장 강렬하게 박혀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다른 작가님의 말로 대체되어 있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
작가님이 기존에 인용을 하신 부분은 대화로 치면 이런 겁니다.
작가님이 저에게,
“편집자님, 저희 남편이 그러는데 저 진짜 최선을 다했대요.”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와 비교해서,
“편집자님, 저 진짜 최선을 다했어요.”라고 직접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건 어떤가요?
 더 명확하고 힘이 있지 않나요?
앞서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을 옮기는 것과는 그 힘이 다릅니다.

핵심적인 말을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서 하지 마세요. 작가님은 작가님의 말로도 충분히 잘 전달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책에서 작가님이 하려는 말들이 독자들에게 더 진정성 있고 힘 있게 다가갈 거고, 이 책이 더욱더 작가님 책 같을 거예요.

- 마누스 출판 L편집자님


편집자님은 자신의 의견일 뿐, 절대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작가님이 누군가의 글을 인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들이 작가님의 개성 있는 글을 인용하게 되길 바랐어요."


편집자님의 편지가 인상 깊어서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편지 전문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리고 역시 글쓰기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느꼈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는, '혹시 글쓰기 전문가가 내 글을 보며 속으로 흉을 보면 어쩌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지키면서 무슨 글을 쓰냐고 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걱정을 줄곧 해왔다. 그래서일까. 책이나 강연 등에서 얄팍하게 알게 된 글쓰기 방법들에 집착하기도 했다. 접속사는 최대한 안 쓰는 게 좋고, 단문으로 쓰는 게 좋고, 인용을 하면 글이 풍부해지고... 그런 내용들 말이다. 그런데 그런 법칙(?)들을 어정쩡하게 적용하다 보면, '잘 읽히는 글, 진심을 담은 글을 쓰는 게 최우선'이라고 여겼던 나의 목표가 어그러질 때도 많았다.

인용도 마찬가지였다. '인용을 많이 해야 글이 풍부해진다는데, 내가 이 원고에 인용을 너무 안 넣은 거 아닐까?'라는 걱정까지 해오고 있던 나인지라, 도리어 인용을 빼보자는 편집자님의 편지를 읽은 뒤많은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님의 말씀대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나의 인생, 생각, 가치관 등을 나만의 목소리로 '고스란히' 담아낸 책이다. 그런데 나의 생각을 실컷 말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작가님의 말은, 뭐랄까, 쌩뚱맞다고 해야 할까. 분명 몰입을 방해하는 느낌이 있었다.


무엇이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중요한 거였다. 건 어떤 분야에서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고 말해주어도 나는 잘 믿지 않았다.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규칙이나 지름길 정도는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지원해봐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다. 하지만 배움이란 역시 책만 들여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배우고, 깨우치는 게 최고인 것 같다. 특히 나처럼 무언가를 정식으로 배우는 순간부터 오히려 틀에 꽉 갇혀버리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어쨌든, 글쓰기엔 정말 정답이 없으니 글의 성격이나 흐름, 목적에 따라 유연하게 생각하고 각각 그에 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는 걸 편집자님 덕에 새삼 깨달았다. 규칙이니 비법이니 그런 거 자꾸 계산하려 들지 말고 좀 더 겁 없이 써야겠다. 대신 내 글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내가 택한 방법이 글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가, 나의 글은 목적지를 잘 향해가고 있는가, 그런 고민을 더 자주 해보아야겠다. 역시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 게 가장 어렵다.


인용을 빼고 나의 문장으로 다시 쓰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편집자님이 적어주신 편지 의도를 잘 새겨보려 노력하며 고치고, 또 고쳐서 2교를 마쳤다. 나를 고대로 담아낸 에세이인 만큼 이 책은 최대한 '나'여야 한다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콕 집어서 알려주신 편집자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만일 "작가님, 인용은 빼는 게 나을 것 같아요."라고만 말씀해주셨다면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인용이 들어가 무조건 좋은 거 아닌가? 멋있잖아.(?) 그런 꽉 막힌 생각에서 잘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 편집자님께서도 나에게 하나의 '가르침'을 선사해주신 것과 다름없지만, 이 책 안에서 그 방법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를 세세히 설명해주셨기에, 납득의 수준을 넘어서 생각의 폭까지 넓힐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마누스 출판사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는  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글과 책에 진심이고, 작가를 존중해주고, 없는 시간을 쪼개어 작가 교육(?)까지 해내고 계신 그들은 그 얼마나 근사한 분들인가.

마누스는 꾸며진 글이 아닌 순수한 글을 지향한다. 쉽게 읽히며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그런 글을 펴낸다. 그러한 출판사와 책을 내게 되었으니, 나도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점검해보아야겠다. 나의 원고에 충분히 사람 냄새가 풍기는가. 억지로 꾸며내지 않았는가, 하는 것들.






이렇게 제법 많은 것들을 느끼며 2교마감했다. 지난번에도 썼지만, 빨리 책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과, 이 소중한 작업이 끝나가서 아쉽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마감 직후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다음에 밀려오는 울적함도 무시할 수 없다. 초보 작가에게 주어진 '마감'이라는 존재는, 스트레스 가득하고 괴로우면서도 한없이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다. 내가 언제 '마감'이라는 걸 또 해볼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으로 매 작업에 임하게 되는 것 같다.


앞으로도 마감에 괴로워하며 동시에 행복해하는 날들이 종종 있기를 바라며-

길고 긴 2교 마감 기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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