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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Jan 02. 2023

나의 도도한 강아지와 교감하기

우는 보호자를 위로하는 강아지 영상을 보았다. 반려견이 얼마나 보호자를 사랑하는지, 또 반려견과 보호자가 얼마나 진하게 교감하는지 느낄 수 있는 영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 아래엔 감동받았다는 댓글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고개를 돌려 달콩이의 얼굴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흥, 소리가 나왔다. 평소 달콩이는 내가 울든 말든 멀찍이서 자기 자리 지키기 바쁘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면 '엄마 또 왜 죠래?'하는 눈빛으로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눈 감고 코코 소리를 내며 잠잔다. 섭섭해서 나는 더 서럽게 눈물을 닦는다. 하지만 달콩이가 와주길 바라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내가 먼저 달콩이에게 다가간다.


달콩이는 11킬로 강아지라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다. 들어 올리기 조금 무겁지만 그래도 품에 안기 딱 좋다. 보통은 달콩이가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그 자세 그대로 둔 채, 내 팔을 동그랗게 뻗어서 안아준다. 나의 얼굴과 손에 털뭉치가 닿는 것만으로도 포근한 위로가 된다. 나의 사랑스러운 똥강아지. 좀처럼 먼저 다가오는 일이 없는 녀석. 얄밉다가도 막상 나의 품에 코를 박은 채 가만히 기다려주는 달콩이를 보면 웃음이 난다. 궁둥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다 보면, 어느새 달콩이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 볼을 핥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을 하고선.


가끔 생리통이 심한 날. 침대에서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려도 달콩이는 태평하다. "달콩아아아. 엄마 아파... 엄마 많이 아프단 말이야아아... 이리 좀 와줘..." 애정을 구걸하다시피 해보지만, 달콩이의 도도함을 이길 순 없다. 아플 땐 먼저 다가갈 힘도 없으니 달콩이를 그저 원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미워. 엄마한테도 안 오고. 입이 삐죽 나온 채 쓰러져 있다 보면 달콩이는 얼마 뒤에야 은근슬쩍 침대에 올라와서 내 발 밑에 자리 잡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침대를 더듬다 보면 달콩이가 발에 닿는다. 푹신한 달콩이의 털과 따뜻한 체온.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이처럼 달콩이는 보호자와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강아지는 아니다. 보호자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건 기본이고, 보호자의 심리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거나 그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 사람과 거리를 두는 달콩이를 보고 누군가가 "얘는 강아지 같은 면이 좀 없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강아지 같은 면이 뭘까. 떠올려보니 나 역시 초반에는 달콩이에게 그 '강아지 같은 면'을 기대한 적이 있었다. 애교도 많고, 계속 사람 무릎에 올라오고, 안아달라고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배를 뒤집는 강아지를. 그래서 막상 새초롬한 달콩이에게 종종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달콩이를 쭉 지켜보다 보니, 이제는 '이게 서운해할 일인가?' 싶다.


반려견은 당연히 보호자에게 먼저 다가오는 존재라고 여겼었다. 따져보니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가 필요해서 달콩이와 가족이 된 게 아니니까. 달콩이는 독립적이지만 늘 곁에 함께 하는 '가족'의 모습 그 자체다. 오라고 해서 순순히 오진 않아도, 달콩이는 늘 멀리서 우리를 살핀다. 우리가 달콩이를 등지고 가버리는 척하면 슬쩍 뒤꽁무니를 쫓아올 줄도 안다. 사람과 거리를 두는 편이라, 원하는 게 있어도 쉽게 매달리거나 보채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놀고 싶은 걸 못 참을 때에는 인형을 문 채 글 쓰는 내 근처로 와서 구슬픈 삑삑이 소리와 불쌍한 눈빛을 동시에 발사한다. 달콩이표 원거리 공격인 셈이다.


골똘히 생각해 보니, 그런 달콩이라서 참 다행이다. 보호자 감정에 잘 휩쓸리지 않는 달콩이라서. 나의 우울과 불안을 가져가지 않아서.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키웠던 나의 첫 반려견 꾸부는 나의 우울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내가 방문을 닫고 울면 꾸부는 어김없이 방문을 긁었다. 문을 열어주면 총총총 옆으로 다가와서 날 지켜주었다. 나는 내 옆에 와 준 꾸부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짠 눈물이 꾸부의 털과 피부를 지나 마음에까지 옮아갔을 것이다. 꾸부는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졌고 자주 사람 눈치를 보았으며 가끔은 정말이지 우울해 보였다. 그 시절 나는 꾸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돌이켜보면 이기적인 형태의 사랑이었다. 나에게 맞추어주길 바랐고, 부르면 와 주길 바랐고, 나를 기다려주길 바랐고,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이제 와서 꾸부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반려견이 보호자를 일방적으로 위로해 줄 의무는 없는데. 나는 꾸부에게 그걸 강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새침한 달콩이를 보며 서운한 감정이 들 때마다, 이내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을 타이른다. 다행인 거야. 달콩이가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강아지라서. 섭섭함을 거두고, 내가 더 사랑을 표현한다. 사람도 사랑을 겉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거니까.


게다가 달콩이도 자기의 방식대로 사랑을 보여준다. 평소 달콩이는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 부부를 지킨다. 바람에 날아가는 비닐봉지만 보아도 화들짝 놀라 도망갈 정도로 겁이 많으면서도, 항상 우리가 머무는 공간의 문 앞에서 보초를 선다. 시선은 언제나 바깥쪽을 향해 있다.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멍멍거리며 쫓아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달콩이는 우리를 신뢰한다. 무섭고 불편할 법도 한데, 위잉 소리를 내는 이발기로 예민한 부위를 이발해도 가만히 기다려준다. 또, 무작정 다가가면 도망부터 가는 달콩이지만 다가가는 목적을 알 때는 도망가지 않는다. 상처를 치료해주려고 다가가면, 연고를 보는 순간 걸음을 멈춘 채 얌전히 치료에 임한다. 우리가 예뻐해 주는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서 그럴 땐 알아서 배를 뒤집는다. 거리를 두는 게 더 익숙한 달콩이가 아주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그 순간순간마다, 나는 달콩이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낀다.


앞으로도 달콩이가 자신의 영역을 지킬 줄 알았으면 좋겠다. 보호자에게 헌신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섭섭한 순간들이 와도 괜찮다. 원래 가족이라면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서로 무심하게 굴기도 하는 거니까. 아빠가 쌀쌀맞은 달콩이를 보시고는 "온정이랑 똑 닮았네, 뭐."라고 말씀한 적도 있다(죄송해요 아빠). 나도 부모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표현에 서툴고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했었으니, 가족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달콩이는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웃게 하고,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 달콩이를 알아가면 갈수록, 나는 달콩이가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먼저 달려간다. 그저 사랑을 퍼부어주러 다가갈 때, 달콩이는 내 마음을 어찌 알고는 기꺼이 배를 뒤집는다.






커버 사진: 잔디 위의 달콩 / 필름카메라 Olympus PEN EE3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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