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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Oct 09. 2023

오빠 결혼식 비하인드

#미국결혼식 #새언니 #남편찬스

1. 새언니

'새언니'. 그 호칭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다. 우리 오빠에게 평생의 짝이 생겼다니. 나에게 새언니가 생겼다니. 여전히 실감이 잘 안 난다.


오빠와 새언니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만나, 2년 넘게 연애하고 결혼했다. 오빠가 '만나는 사람이 생겼는데 성격이 정말 잘 맞는다'며 처음 새언니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오빠랑 똑 닮아서 정말 놀랐다. 꼬리 쪽이 살짝 처진 눈매와 토끼 같은 입매, 웃을 때 풍기는 분위기까지. 어디 가서 남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둘은 비슷했다.

닮은 사람끼리 만나면 꼭 결혼하던데. 난 혼자 김칫국을 몇 사발씩 마셨지만 오빠에게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저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라고 종종 물었고, 그때마다 오빠는 "그럼ㅋㅋㅋ"이라고 답했다. '그럼'이라는 오빠의 대답을 들으면 안심이 되었다. 둘이 잘 지내는구나. 닮은 외모만큼 서로 잘 맞나 보다. 이대로 쭉 잘 만났으면 좋겠다. 아니, 얼른 결혼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오빠의 결혼을 제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미국에 오빠의 가족이 있었으면 했다. 오빠는 혼자서 미국 생활을 오래 했고, 건강 관리를 워낙 잘해서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아왔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에 늘 걱정이 있었다. 특히 코로나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거리에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던 그때. 백신 부작용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돌고, 코로나에 확진된 미국인들은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나간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나는 너무 불안했다. 오히려 오빠는 "내 주변 상황은 그렇게 심각하진 않아."라고 무심히 말했지만, 직접 볼 수 없는 입장에서 오빠의 말은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멀고 넓은 땅에 오빠가 식구 한 명도 없이 혼자 산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 오빠의 옆에 여자친구가 있어서 안심이었고, 그 여자친구가 이제는 오빠의 든든한 가족이 되었다. 평생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한국에서도 서로 맞는 짝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그 넓은 미국 땅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다니. 이보다 더 운명 같은 일이 있을까.

새언니와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나마 최대한 내 마음을 표현하는데, 따지고 보면 죄다 애정 표현이다. 새언니 사랑스럽다, 예쁘다, 완벽하다... 얼마 전에는 '홀딱 반했다'는 말까지 했는데, 아마 그거 이성한테 고백할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주책맞지만 어쩔 수가 없다. 휴대전화 화면 너머로 함께 웃고 있는 오빠와 새언니를 보면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서툰 한국말을 한 글자, 한 글자 차근차근 더해서 문장으로 완성하는 새언니를 보면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우리 식구가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뭐라도 좋은 이야기를 던지고 싶어 안달이 날 수밖에.


사실 내가 새언니를 처음으로 직접 만난 건 결혼식 이틀 전이었다. 부모님은 상견례 때 미국에 다녀오셨지만 나는 따라갈 여건이 안 되었다. 그래서 결혼 전에는 두어번 영상통화 해본 게 전부였고, 결혼식이 되어서야 새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정신없는 결혼식 일정 중간중간에 짧게 짧게 몇 마디 나누어 본 게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새언니는 가까이하기엔 물리적으로 너무 멀리 있는 존재이다.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 막 가족이 된 건데 마음 급할 게 뭐 있나 싶다. 앞으로 적어도 몇십 년을 가족으로 살아갈 텐데. 기회가 될 때 미국과 한국을 서로 오가며 새언니와 천천히 가까워지면 좋겠다.




2. 남편 찬스

사실 이번 미국행에서 가장 큰 몫을 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오빠 결혼식 일정 내내 부모님을 모시고 기사 역할을 했다. 네 명의 짐을 실어야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팰리세이드보다도 더 큰 차를 렌트했는데, 남편은 그렇게 큰 차를 몰아 본 경험이 별로 없었음에도 운전을 척척 잘 해내서 줄곧 부모님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남편은 돌발행동 좋아하시는 우리 아부지 때문에 몇 번 진땀을 뺐고, 덤벙거리는 엄마 때문에도 가끔 진땀을 뺐으며, 아부지와 어머니를 딱 반쪽씩 닮은 나까지 챙기느라 또 진땀을 뺐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결혼식 장면들을 부지런히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주었고, 부모님께서 한국말로 축사를 하실 때는 옆에서 영어로 통역까지 했다. 남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고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내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도 조금 다행이었던 건 남편이 결혼식 3일 내내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다(칭찬의 내용은 비밀리에 부치겠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서 칭찬을 할 정도였으니, 남편도 그럴 때마다 내심 피로가 뿌듯함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혼식이 끝난 뒤 엄마와 아빠는 “홍서방 덕분에 우리 가족이 더 빛날 수 있었어.”라고 말씀하셨다. 아빠, 엄마, 나, 남편. 태평양 너머 날아간 네 명의 소규모 가족 하객이었지만, 다행히 우린 큰 이질감없이 그 자리에 속할 수 있었다.





오빠 결혼식/ Photo by Sim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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