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물을 보는 방식》 퇴고 일기 (3)

2차 퇴고, 두 번째

by 온정

초여름 출간 예정인 산문집 <사물을 보는 방식> 퇴고 일기.


1차 퇴고 - 목차 배열 후 2차 퇴고,

그다음 1교 - 2교 - 3교의 과정을 거칠 예정.

그중에서 지금은 2차 퇴고 작업 중.





1.

<나만의 퇴고 과정>

원고 인쇄 → 파란 펜 들고 고침 → 고친 걸 한 번 더 읽으면서 또 고침 → 고친 걸 한글 파일에 적용하면서 또 고침 → 고친 걸 아이패드로 확인하면서 또 고침 → 그렇게 고친 것 한 번 더 한글 파일에 적용 → 틀린 건 없는지 아이패드로 쭉 읽기 → 마감.

(이렇게 한 사이클. 1교, 2교, 3교 때 반복.)


- 횟수를 정해두는 건 아니고, 약간 더 이상 보면 미칠 것 같다(?) 싶을 때까지 읽는 것 같다. 많이 읽는 것보다는 꼼꼼하게 읽는 데에 중점을 두는 편. 이유는 아래(2번)에.


- 강박이 생기는 지점이 있다. 원고를 수기로 고친 다음, 결국에는 고친 걸 한글 파일에 적용해야 한다. 이때, 그걸 적용하는 과정에서 혹시 실수로 멀쩡한 문장을 지워버린다거나 나도 모르게 스페이스를 누른다거나 오타를 낸다거나 뭐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마지막에 휘리릭이라도 한 번 더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문제는 휘리릭 보다가 고칠 게 또 생긴다는 것. 그러면 결국 한글 파일을 또 건드려야 하고, 건드리고 나면 또 불안하고. 그렇게 퇴고의 무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


2.

하도 여러 번 읽다 보니, 읽을 때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면 어떤 문장들은 나도 모르게 별생각 없이 넘어가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문장들이 그렇게 흘러 지나가버린다. 이미 거의 외워버릴 지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을 읽고 있으면 다음에 어떤 문장이 나올지 뻔히 아는 것이다. 내가 쓴 문장이다 보니 의식 없이 읽으면 죄다 자연스러운 문장처럼 보인다. 하나하나 눈에 힘을 주고 의식을 담아 읽어야 틀린 것,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영혼 없이 자연스럽게 읽어버렸다면 의식적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그 문장이 괜찮은 문장인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 되돌아간다.

(물론 빨리 읽으면서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퇴고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로 하게 되는 듯.)


3.

명확한 서사가 있는 꼭지들은 무난하게 퇴고했지만,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썼던 꼭지들(사물을 소재로 나만의 생각을 풀어나간 글)이 고칠 게 너무 많았다.


확실히 퇴고 작업 초반에 가장 많이 고친다.

분명 초고를 쓰고 다듬을 때도 정성을 굉장히 많이 들였는데, 막상 2차 퇴고 때까지도 파란 펜이 난무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위안이 될까 싶어 <너를 돌보며 어른이 된다> 첫 퇴고 원고(인쇄본)를 찾아보았다. 허허. 문단 통째를 삭제하고 다시 쓴 글들과, 여백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파란 펜이 지배하는 모습. 심지어 글 하나는 아예 빼버리고 새로 쓰기도 했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양반이네.' 생각하니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3교 때까지 어떤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게 보이니까.)


4.

퇴고할 때 가장 신나는 순간.

문단의 순서를 통째로 맞바꾸었는데, 그게 찰떡일 때.

고치기 전에도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느꼈는데, 문단을 바꿨더니 흐름이 눈에 띄게 좋아질 때가 있다.

글에도 다 제자리가 있구나 싶고...


이래서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럽다 싶으면 일단 이렇게 저렇게 고쳐봐야 한다. 고친 게 더 별로면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5.

문장을 고치다 보면,

정말 사소한 부분만 고쳤는데도 문장의 숨결이 확 살아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장소가 항상 나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건 아니다."

→ "하지만 그 장소가 나에게 늘 기쁨만을 선사했던 건 아니다."

평범했던 문장이 약간의 수정만으로 절절한 분위기, 극적인 분위기를 띄게 되었다.


- 어떤 문장은 작은따옴표만 삭제했을 뿐인데 훨씬 세련되어지기도 했다.


- 아래 문장은 앞, 뒤 문장을 읽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는 한데, 그냥 하나의 예시로 적어본다.

"나는 울먹거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언니가 아무리 힘껏 털어 보아도 개미는 나오지 않았다."

→ "언니가 아무리 힘껏 털어 보아도 개미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울먹거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쉼표 앞뒤를 서로 맞바꾸기만 했는데도 맥락 상의 흐름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어쨌든, 나는 이런 사소한 부분을 열심히 고친다.


6.

마누스 대표님의 기획이 빛을 발한다. 목차까지 적용해서 쭉 읽어보니 확실히 느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고 한두 달 정도 되었을 때쯤, 나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마냥 즐겁게 썼었다. 어찌나 들떠있었는지 글이 쭉쭉 써졌다. 하지만 글이 스무 개 정도 쌓이자 안 좋은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글의 흐름이나 결론, 분위기가 모두 엇비슷했다. (개인적으로 '자연스러운 결론'이 에세이의 질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썼더라도 결론에 다다라서 김 빠질 때가 많다. 그렇다고 또 너무 '나 결론이야!!' 소리 지르는 듯한 결론도 피해야 하고. 실제로 에세이를 정말 잘 쓰는 작가들은 결론을 완전무결하게 쓴다. 나 역시 결론을 어떻게 잘 쓸지가 늘 고민이고. 그런데 앞서 썼던 스무 개 글들을 모아두고 보니, 결론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비슷비슷해서 영 매력이 없었다.)


이런 글들이 모이면 자칫 지루하고 딱딱한 책이 될 것 같아 걱정이 밀려왔다. 앞으로의 글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매력 있는 책이 될지 그 반대가 될지 결정될 듯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춰가야 했는데, 하필 글감은 넘쳐나고 의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상황이라 더 괴로웠다. 의욕이 시키는 대로 마구 쓰다 보면 안 좋은 글이 나올 테니까. 이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그에 맞추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조언을 구하고자 마누스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다.

나의 고민을 들으신 대표님은 '사물'이라는 컨셉에 너무 매몰되지 않게 쓰도록 격려해 주셨는데, '사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대표님의 조언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컨셉이 뭉개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대표님은 컨셉이 뭉개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컨셉을 더 살리는 방향이라고 단호하게 답해주셨다.

아래는 대표님의 카톡.


속성보다 개인적 이야기에 더 방점이 찍힌 꼭지들이 조금 더 더 추가되면 어떨까요?

‘사물을 보는 방식’ 답게 사물의 속성으로 하여금 세상을 말하는 이야기들이 더 부각되려면 오히려 조금 더 폭이 넓은 이야기들이 있어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꼭짓점이 더 도드라져 보이려면 밑변이 넓게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속성 자체에만 너무 집중되어 함몰된다면 꼭짓점이 돋보이는 삼각형태(△입체적 접근)가 아닌 그저 점에서 점으로 이어진 직선형태(─ │평면적 접근)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책의 굵직한 컨셉에 함몰되면 오히려 컨셉이 살지 않거든요.

글에 톤 조절과 높낮이가 있어야 돋보여야 할 글이 더 돋보여요.


대표님의 조언을 마음으로는 이해했지만 솔직히 머리로는 100%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여 책이 된다는 게 약간 상상이 안 됐던 것 같다. (이럴 때 보면 천생 이과생이다. 사물 이야기 = 가차 없이 '사물의 속성' 이야기만 들어가야 한다,라는 공식이 머리에 박혀 있으니 사고가 유연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대표님을 100% 신뢰하기 때문에, 그저 대표님의 의견이기에 믿고 따랐다. (다행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들어간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너무 즐거웠으니 나는 그저 대표님을 믿고 재미있게 쓰면 그만이었다.)


솔직히 목차를 적용하기 전까지도 이런 개인적인 글들을 넣어도 될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목차를 적용하여 순서대로 원고를 쭉 읽어보니, "와, 대표님이 말씀하신 게 이거였구나!" 여러 번 감탄했다.

이야기가 풍성하고 지루할 틈이 없다. 소재도 워낙 다양하고, 글의 색이나 온도도 어느 하나에 치우쳐있지 않아 균형감이 뛰어나다. 모두 대표님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나의 균형을 부지런히 잡아주신 덕분이다.

이번 책 작업은 유독 '혼자서는 절대 쓸 수 없었던 책'이라는 걸 끊임없이 느낀다. 대표님의 조언 하나하나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서로에게 매번 시너지 효과를 주는 우리의 인연이 신기하고, 또 신기하고.

정말이지 즐겁고 감사한 작업.



*

2차 퇴고 일기 끝 :)

1교 때도 이렇게 할 말이 많이 생기려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물을 보는 방식》 퇴고 일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