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
초여름 출간 예정인 산문집 <사물을 보는 방식> 퇴고 일기.
2차 퇴고를 지나 본격적으로 1교 시작.
* 교정교열 단계
1차 퇴고 - 목차 배열 후 2차 퇴고 - 1교 - 2교 - 3교
1.
이번 원고는 1교 시작 전에 퇴고 단계를 치열하게 거쳤기 때문에, 체감상으로는 2교 같은 1교다.
고칠 문장이 끊임없이 눈에 걸리던 단계는 이제 지나갔다. 앞선 단계에서 그렇게 눈에 걸릴 때마다 다 고쳤으니까. 이쯤 되면, 흐린 눈으로 보면 웬만한 문장들은 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솔직히 말해 원고를 읽는 게 고역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멀쩡해 보이는 문장들을 끊임없이 읽으면서 고칠 부분을 뒤져야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냥 매끄럽게 읽어 버렸다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자연스럽게 읽어 보아야 고칠 게 보인다.
아, 그만 보고 싶다, 아 정말 지겹다,라고 느낄 때쯤...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한다. 그때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의욕이 마구 솟구친다. 좀 웃기지만, 틀린 걸 발견하는 순간마다 짜릿하다. 더 치열하게 봐야겠다는 동기부여가 팍팍 된다. (1교니까 짜릿하지, 2교나 3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발견하면 그때는 진짜 막 울고 싶다. 이대로 책이 나왔으면 어쩔 뻔했어, 하면서.)
2.
치명적인 오류의 경우 눈에 띄는 즉시 별표까지 쳐가면서 고친다.
그 외에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겠지만 다듬어야 좀 더 예뻐지겠다 싶은 문장들을 고친다.
이 부분 조금 어색하네, 고쳐볼까? 마음먹고 펜을 든다. 그러고 문장을 고치다 보면 왠지 모를... 묘한 기시감이 든다.
분명 전 단계에서 괜찮다고 자연스레 넘어가기는 했지만, 사실은 이미 예전에 읽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이 아주 살짝 불편했던(그러나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거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부분을 건드렸던) 문장들인 것.
이 정도는 괜찮지 하고 넘어간 것들, 하지만 내 무의식의 어떤 부분을 살짝 거슬리게 했던 부분들이 결국 1교, 2교, 3교를 거치며 한 번은 걸러진다.
3.
눈에 불을 켜고 꾸역꾸역 원고를 읽다 보면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응. 이렇게까지 해야 돼."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4.
<매트릭스> 속 한 장면을 인용했는데, 문득 그게 <매트릭스 2>부터 나온 장면이라는 게 떠올랐다. 후다닥 '2' 추가. 휴우.
5.
1교 하면서 많이 느낀 것.
내가 퇴고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사소한 부분까지 강박적으로 파고드는 이유가 뭘까.
이게 다... 기초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기초가 탄탄하면 오히려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을 텐데, 기초가 부족하다 보니 '문학적 허용' 같은 걸 유연하게 쓰지 못한다.
이게 문법적으로 정말 맞는 표현인지 자꾸 따지게 되고. 어디까지 허용 가능한 것인지 판단이 잘 안 선다.
혹시 내가 틀렸을까 봐 불안할 때가 너무 많다.
(다듬지 않고 올리는 이 글은 어찌나 엉망일까나... 혹시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ㅠㅠ)
이번에도 역시 대표님의 도움을 받아 궁금증을 풀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괜찮은지 의문을 가졌던 문장들 모두 허용 가능한 선이었다.
대표님은 말씀하셨다.
"문학적 표현으로 둬도 될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한 게 맞지요.
이건 의도한 것이냐 의도하지 않은 것이냐로 생각을 해보면 좋습니다."
(책 작업하는 동안 대표님의 도움을 너무 많이 받고, 그걸 일기로 쓰다 보니 맨날 "대표님은 말씀하셨다."라는 문장을 쓰게 된다. 약간 "공자님은 말씀하셨다."라고 쓰는 느낌... 나에겐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에세이는 일단 잘 읽히는 게 가장 중요하지 싶다가도,
나도 책을 여러 권 내고 나니 이제는 글에 너무 힘을 많이 싣는 것 같다. 완벽하게 정제하기를 바라고.
이게 과연 좋은 방향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6.
- 에세이 한 권을 출간한 뒤
- 에세이를 한 권 출간한 뒤
한 글자 옮겼을 뿐인데 뉘앙스가 확 달라진다. 자칫 의미도 달라질 수 있음.
이러니 내가 사소한 것들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지 싶다.
7.
어떤 표현으로 고칠지 고민한 흔적.
결국 '똑같은 결로 움직인다.'로 고쳤다.
(5년 전인가, 친오빠가 새 아이패드 사면서 이전에 쓰던 아이패드를 나에게 넘겼는데, 교정 볼 때마다 너어어무 잘 쓰고 있다. 아이패드 없으면 대체 인쇄를 몇 번을 해야...ㅠㅠ)
8.
온종일 교정지만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밤 12시가 넘었던 어느 날,
완전히 탈진한 채로 썼던 일기를 남기며 마무리한다.
확실히 나는... 일을 사랑한다.
몰입하는 그 시간이 좋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낼 때(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또 그것을 좋은 모양으로 다듬어낼 때 느끼는 뿌듯함이 내 존재의 가치를 선명하게 한다. (글 쓰는 일, 분석하는 일 둘 다...)
온종일 눈이 빠져라 1교지를 봤다.
아 정말 그만 보고 싶다, 그만하면 안 되나, 더 해야 될까, 징징거리면서 했다. 적당히 볼까 하는 내 생각에 혼쭐이라도 내듯 고칠 것이 짠하고 나타난다. 그렇게 지겹도록 하면서도 이 작업이 좋다.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고칠 만한 걸 내 눈으로 발견했다는 것에 또 감사하고.
책 나오고 나면 공허해서 어쩌지. 빨리 세상에 보내고 싶은 마음도 너무너무 크지만, 그 뒤에는 또 한동안 이런 작업을 할 수 없음에 벌써 섭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