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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Jan 30. 2020

경쟁사회에서 항복을 외치다

서른, 퇴사, 방황

 4개월 전 퇴사를 한 뒤, 난 동종업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는 전혀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는 중이다. 앞으로 잘 될 거라는 확신은 아직 없다. 그렇기에 종종 불안함이 찾아온다.

 이런 내 상황을 표현해보자면, 동물의 왕국에서 끝내 살아남지 못한 패배자랄까. 아, 참고로 나 자신을 패배자라고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중요한 건 ‘동물의 왕국’이라는 배경이다. 흙먼지 날리는 세렝게티 초원에 여우 한 마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매일 물어뜯고, 뜯기고, 그 안에서 하루라도, 또 1년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격렬한 술래잡기를 해야만 하는 곳. 내가 살기 위해 약자를 공격해야만 하고, 동시에 강자는 무서운 속도로 내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는 긴박한 곳. 유사한 종의 동물들과는 누가 더 잘났나 겨뤄야 하는 곳. 내 털에 얼마나 윤기가 좔좔 흐르는지, 내 털이 얼마나 풍성한지 뽐내기 위해 매일같이 털을 골라야 하는 곳. 이는 생존과 연관된 문제이며 본능인 셈이니, 이 순리를 거스른다면 살아남기 쉽지 않을 터. 여우는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남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왜....?'라는 물음에 봉착해버렸다. 왜 굳이 치열한 세렝게티 초원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난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저 타고난 본능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진정 평생 사냥만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분명히 눈을 돌려보면 적어도 여기보다는 나에게 더 맞는 장소가 있을 텐데.

 은신처에 숨어서 살고 싶어 여우는  그곳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시는 세렝게티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졌다.

 그러니까 정확히 얘기하자면,  지긋지긋한 경쟁사회에서 나는 항복을 외쳐버렸다. 하지만 항복을 외치기엔  나이 이제 겨우 서른 하나. 너무나도 젊다. 학교라는,   뒤를 잇는 직장이라는 세렝게티 초원에서 몇십 년씩 버텨내는 사람들에 비해 나의 야생 경력은 한없이 짧다. “ 최선을 다했어요.” 라든지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어요.” 따위의 이야기들은 부끄러워서라도 꺼내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탓하고 싶지 않다. 아니, 사실은 자꾸  자신을 탓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야만 하겠다.

 사람은 각기 다른 레벨의 역치를 가진다. 쉽게 말해 똑같은 돌멩이를 던져도 개미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가 하면, 사자에게는 간지러운 수준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9 역치를 가진 사람들은 6 자극 정도야 거뜬히 이겨낼  있다. 하지만 3 역치를 가진 사람이 6 자극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자. 본인 역치 값의 2배에 달하는 자극에 달했으니 이는 거의 치사량과도 같다. 나는 3 역치로 태어나 안간힘을 다해 강해졌으나, 서른이 되어서도 역치 값을 6 정도로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동안 치사량에 달하는 자극을   번씩 받았다. 너덜너덜해진 채로 몸을 일으켜보면 그래도 역치 값이 0.00001 정도씩은 늘어나 있었기에, 쓰러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방법으로 역치를 겨우 6으로 올린 나는 사정이  나아졌을까?

 올해 1,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늘어난다는 사실 하버드대 연구진이 과학적으로 규명했다고 한다.  기사를 접한  나는 “역시 그런 거였어!” 외쳤다. 흰머리의 원인이 대부분 유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나는 한참 뒤에 흰머리가 났어야 정상일 테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흰머리가 났다. 유독 너무 힘들거나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났던 . 집으로 돌아와 양치를 하고 있자면 거울에 비친  머리엔 어김없이  가닥이 빼꼼, 하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화가 나자마자 흰머리가 생기는 것은 말도  되는 일이다만. 신기하게도 그런 날이면  흰머리를  가닥 이상 발견했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한껏 부릅뜨고 족집게로 흰머리를 뽑으며 상상했다. 장기 어딘가에서 나의 감정이 공기방울을 터트리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그중 일부는 심장으로 증발되어  마음을 아프게 공격하고, 일부는 산의 형태로 증발되어 위와 식도를 공격해버리고,  일부는 눈동자로 증발이 되어 눈물의 형태로 흘러버리고,  일부는 머리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가서는 두피가 한껏 뜨거워지고,  두피 위에 결국 흰머리가 ‘하고 올라오는 상상. 나는 표면적으로 역치 값이 올라가며 강해졌지만,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의 마음이, 나의 위가, 나의 식도가, 나의 눈이, 나의 두피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역치가 3이었던 그냥 나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

, 제발  그만두고 싶다....’

평생을 이와 같은 고민과 마주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go)!”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른이 지난  결국에는 “스톱(stop)!” 외쳐버렸다. 항복, 항복.  모든  불살라버려서 재만 남아버릴 지경이에요. 그러니 항복할래요.



 모두들 자신만의 세렝게티 초원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든, 힘들지 않은 일이 있을까. 그렇기에 잠시나마 스톱을 외쳐버린 나는 계속해서 불안하다. 원래 내가 떠돌던 세렝게티 초원이 아닌, 다른 안식처를 찾아 떠나는 일이 두렵기만 하다. 그래도 그 불안을 애써 떨쳐내고 꼭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으리라. 더 이상 내 능력 밖의 일을 하느라 망가지지 않으리라.


김연수 작가님은 <청춘의 문장>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김연수 작가님은 글을 쓸 때, 가장 사람답게 산다고 했다. 또 글을 쓸 때, 한없이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왜?’라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은 지금까지 충분히 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을 찾을 차례이다. 내가 순간의 불안함에 떠밀려 다시 세렝게티 초원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의 항복은 정당하다!’고 크게 외쳐본다.




커버 사진/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필름 카메라 X-300으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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